아래 위로 검은 옷을 입은 병사들이 나란히 서서 허리를 숙였다. 오늘도 또 허탕이라는 말이 나오겠구나. 재현은 답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그들이 입을 떼기도 전에 더운데 고생했다. 들어가보거라. 짧게 말을 하고는 서책에 시선을 다시 고정했다.
호기롭게 제 어미 앞에서 세자의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겠다 했지만 제가 쓸 수 있는 병력이라고는 열 명 남짓이 전부였고, 그 마저도 둘은 호위무사에서 차출해야 했다. 넓디 넓은 조선 땅에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주연을 찾는 건 모래사장 속 바늘 찾기에 가까웠다. 주연과 안 왕후의 위치는 비밀에 부쳐졌다. 그나마 알 것 같은 사람들은 중전에게 지령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하루 하루 속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았다. 저하 저녁상을 들이겠사옵니다. 문밖에서 정상궁의 말소리가 들렸다. 재현의 눈 앞엔 녹그릇에 담긴 십이첩 반상이 펼쳐졌다. 수저를 들다 재현은 문득 밥상을 걷어차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때 무언가 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주연이를 찾을 수 없다면 데려오게 하면 된다. 어마마마가 제 발로 이주연을 내 앞에 데려오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마마! 큰일났사옵니다!”
중궁전 상궁이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뛰어와 문을 열고는 최씨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세자저하께서 경회루 앞 호숫가에서 산책을 하시다 그만 자리에서 쓰러지셨다 하옵니다. 상궁의 말을 들은 중전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정말 이 어미가 죽는 꼴을 봐야겠습니까!”
“제가 먼저 죽을텐데요.”
중전이 가슴팍을 치며 답답한 신음을 냈다. 바싹 말라 갈라진 핏기 없는 입술로 재현이 말을 했다. 5일 동안 식음을 전폐한 재현의 얼굴은 있던 젖살 마저 다 빠져 날카롭고 예민해 보이기 그지 없었다. 턱뼈가 도드라져 있었고, 콧대는 예전보다 더 선명했다. 아무리 잔인한 제 어미라도 당신이 왕으로 세워야할 제가 죽으려 든다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재현은 답을 하는 대신 중전과 윤의관이 앉은 자리 반대로 돌아 누워 벽을 쳐다봤다.
“세자의 상태는 어떠한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마마, 저하께서 그나마 평소 옥체가 건강하셔 이만큼 버티시는 것이지 조금만 더 있으시면 앉기도 어려우실 정도로 기력이 쇠해지실 것이옵니다. 게다가 산책은 계속 하셔서...”
중전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저렇게까지 수운대군에게 집착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치 환민이 죽기 전 내리고 간 저주같이 느껴져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죽어서도 지겹게 저를 괴롭히는 것처럼,
“수운대군을 불러드리지요.”
“..정말 제가 죽기 직전까지 가야 약조를 지키시니 황송하여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고집 그만 부리시고 밥부터 드세요.”
등 뒤로 덜컹 하고 중전이 밥상을 직접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윤의관은 안절부절 못한 채 날개뼈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난 재현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재현이 제 오른팔로 이부자리를 짚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중전을 마주보고 앉았다.
“주연이가 제 눈 앞에 오면 먹겠습니다.”
“세자!”
“이리 말해놓고 또 저를 속이시면 어쩝니까.”
“......”
“그러니 주연이를 한시라도 빨리 데려오셔야겠지요. 얼른 움직이지 않으시고 무얼 하십니까.”
이번엔 반대로 세자의 얼굴이 섬뜩했다.
―
오늘은 수확이 좋질 않았다. 그나마 캔 것도 껍질이 깨져서 제 값을 받지 못하게 생겼다. 쯧쯧. 아직 처음이라 봐주는거여. 이렇게 맘씨 좋은 거상 없어. 풀이 죽은 주연에 지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상인이 흘깃거리다 원래보다 엽전 두 닢을 더 쥐어줬다. 신에는 갯벌 진흙이 범벅이었고 몸에는 흘린 땀이 뚝 뚝 떨어져 찝찝한 기분이 들 법도 했지만 주연은 되레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몸 쓰는 일을 하다 보면 재현에 대한 생각의 기회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문득 파고드는 마음까진 어쩔 수 없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동궁전 그 날에 묶여 있을 것 같았다.
출발할 때부터 재현의 말처럼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주연은 딱 절반만 믿었다. 그리고 절반의 믿음처럼 도성으로 가는 길목에서 무리의 습격을 받았고, 눈이 가려진 채 몸이 묶여 떨어진 곳이 여기 땅끝 마을이었다. 중전이었던 어머니는 마을사람들 떨어진 옷을 기우는 일을 했고, 평생을 궁 안에서 귀하게 자란 주연이 할 수 있는 일은 조개를 캐는 일이었다. 이곳에 온 이튿날부터 주연은 비단옷 대신 허름한 천옷을 입고 맨발로 갯벌을 거닐었다. 배우는 속도가 좀 느렸지만 묵묵하고 성실한 주연의 태도 덕에 동네 일꾼들에게는 금방 호감을 살 수 있었다.
“여기까지 쫓아냈으면 그만이지 뭘 오라가라 하느냐. 가면 대군이 위험해질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바구니에 오늘 저녁거리만큼의 조개와 받은 삯을 들고 오는데 병사로 보이는 남자와 대치 중인 어머니가 보였다. 주연이 속도를 높여 뛰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대군마마.”
“들을 필요도 없다.”
“마마! 꼭 데려 오시라는 중궁전의 명이 있었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병사 무리가 주연과 안 왕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리를 들었는지 사람들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재현은 지금쯤 어찌 지내고 있을까. 의젓하게 세자 노릇을 하고 있을까. 주연은 사실 매일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재현이 저를 감싸던 따뜻한 감촉이 아직 남아 있는 것도 같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갈 수 없습니다. 어머니 말처럼 저는 쫓겨난 몸입니다. 그러니 이만 일어서 돌아들 가세요.”
주연이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안고 뒤돌았다.
“마마!! 저하가 죽어가고 있사옵니다.”
병사 중 한명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주연의 발걸음이 동시에 자리에 멈춰섰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저하께서 마마가 오시기 전까지 물 한 모금 드시질 않고 계시옵니다. 벌써 7일째인데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정말 숨이 끊어지실 수도 있사옵니다.”
대체 왜 재현이 식음전폐를 하고 있단 말인가. 고작 저 때문에? 주연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죽어가고 있다는 말에 그런 의문마저 휘발됐다. 솔직히는 너무도 보고 싶었다. 한 번만 재현을 볼 수 있다면 사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허름한 집으로 들어간 주연은 단출하게 짐을 챙겼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어머니의 손을 꾹 맞잡았다.
제가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잘 먹고 잘 살고 가까운 시일 내 아리따운 세자빈까지 맞을 줄 알았던 재현은 바싹 마른 얼굴을 하고는 두터운 이불을 덮고 눈을 감고 있었다. 눈밑이 퀭했다. 끼니를 먹지 않으니 얼굴은 성할리가 없었다. 주연을 보필하던 김상궁은 둘의 재회를 안타까운 얼굴로 쳐다봤다. 주연을 보자마자 울기도 했다.
“저하 눈 좀 떠보십시오.”
윤의관이 거의 애원하듯 말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대군마마께서 오셨습니다.”
그 말에 재현이 눈을 희미하게 떴다. 눈앞엔 아무 말도 하지 못한채 서 있는 주연이 보였다. 꿈인가. 아니다. 진짜 이주연이다. 얼굴이 볕에 까무잡잡하게 탄 게 나갈 때와 같은 푸른 도포를 입고 있었지만 어디선가 고생을 한 것이 분명했다.
“..주..연아.”
“..저하.”
“가까이 오거라.”
주연이 몸을 당겨 재현의 앞에 앉음과 동시에 재현이 주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진짜 주연이구나. 멕아리 없던 목소리에 단단한 힘이 들어갔다. 재현의 행동에 윤의관이 눈치껏 일어나 내관들과 상궁들을 물려 함께 세자의 처소밖으로 나갔다.
“왜 이러고 계십니까.”
“보고 싶었어..”
“성군이 되어달라 하지 않았습니까.”
“네가 보고 싶어서 그랬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데 주연은 꾹 참았다. 생기를 잃은 짙은 갈색 눈동자에 슬픔을 감출 길이 없었다. 대체 왜 그러셨어요 왜 멍청하게... 주연은 쿨쩍 한 번 눈물을 삭히고 제 뒤에 있던 상을 당겨왔다. 가뭄 난 논바닥처럼 마른 재현의 입술을 보니 번쩍 정신이 들었다. 물잔부터 내밀었다.
“나 좀 도와줄래.. 힘이 안 들어가서.”
주연이 재현의 팔 안쪽에 제 어깨를 끼우고 등에 팔을 둘렀다.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안는 꼴이 됐다.
“바닷일을 하였느냐.”
그만 풀려는 주연의 등을 다시 꽉 안으며 재현이 주연의 귀에다 속삭였다. 그걸 어찌... 귀신같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주연이 움찔한다.
“너한테선 항상 들풀 냄새가 났는데 지금은 비릿한 바다냄새가 나는구나.”
귓가에 재현의 뜨거운 숨이 다시 닿았다. 주연은 빨리 팔을 풀고 싶었다. 제 빨개진 귀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재현과 떨어져 있으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좀 익혔다고 생각했는데 손 쓸 도리가 없었다. 비릿하다는 말에 솔직히 조금 창피하기도 했다.
주연과 마주 앉은 채 재현은 물 한 컵을 다 비웠다. 그간 축적된 갈증이 얼마였는지 그러고도 또 한 컵을 비웠다. 그동안 주연은 죽그릇 뚜껑을 열고 놋수저에 흰죽 조금을 담았다. 아마 장기가 많이 상했을 터였다. 조금씩 천천히 먹어야 체하지 않을 일이었다.
주연이 내민 숟가락을 재현은 받아 드는 대신 가만 바라봤다. 뭔가를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죽에 들어간 밥알이 좀 굵은 것 같구나.”
“덜 갈렸다면 다시 내오라 하겠습니다.”
주연이 일어서려는데 재현이 팔을 꽉 붙잡았다.
“네가 씹어서 내게 주면 되질 않느냐.”
예? 주연은 제가 뭘 잘못 들었나하고 맹한 얼굴로 재현을 쳐다봤다. 주로 궁에 있을 땐 엏 소리와 함께 장난질을 당할 때 짓던 얼굴이었다.
“무얼 하느냐.”
“그건 예가 아닙니다 저하. 상궁을 불러 빨리 다시 내오라 하겠습니다. 그러니 잠시...”
“명령이다.”
네 음절에 주연의 행동이 멈췄다. 세자의 명인데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재현이 제 권위를 이 시점에 이런 식으로 사용할 것이라 주연은 상상도 못했기에 두 눈을 꿈뻑였다. 그러다 전보다 더 도드라진 재현의 손가락 뼈들이 눈에 들아왔다.
주연이 제 입술을 잘근 씹고는 결심한 얼굴로 흰죽을 조금 담았던 놋수저를 제 입안에 넣었다. 그리고는 꼭꼭 눌러 씹었다. 씹는 내내 재현이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 죽을 넘기지 않기 위해서는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그리고는 그걸 도로 뱉기 위해 숟가락을 드는 순간, 재현이 숟갈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실수가 아니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다. 재현에게 줄 죽을 머금고 있느라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는 주연에게 재현이 다가갔다. 얼굴이 지척에 있었다.
“내가 입술을 대면..죽을 넘겨주면 된다.”
재현이 눈을 내리깔고는 고개를 살짝 틀어 주연의 뒷통수를 끌어당겼다. 잠시고 당황한 주연에 재현이 혀를 내밀어 주연의 입술 사이를 건드렸다. 그에 주연이 조금씩 입을 벌려 제 안에 있던 것들을 재현에게 넘기기 시작했다. 흘리지 않기 위해 천천히 넘기느라 시간이 지체됐다. 죽 알갱이가 넘어가는 동안 둘의 입술과 혀가 몇번이고 뒤엉켰다 자리를 찾았다 다시 엉켰다. 재현의 혀가 제 입안을 훼집고 고른 치열을 쓸어대는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주연은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재현의 타액에 무슨 약이라도 든 것처럼. 그리고 재현이 제 안에 있던 모든 것을 가져갔을 때까지, 그 이후에도 떼고 싶지 않았다.
떨어진 재현과 주연의 입술은 죽에 뜬 기름과 서로의 타액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직 죽이 많이 남았는데..”
재현이 열 숟가락은 더 남은 그릇을 바라봤다.
“내게 또 넘겨 줄 수 있겠느냐.”
당장 재현과 닿고 싶은 충동이 인다. 조심스럽지만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주연에 재현이 빙긋 웃는다. 오랜만에 짓는 웃음이었다. 둘의 입술이 맞물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서로의 허리와 목을 끌어안은 채 그릇이 다 비워지도록 둘은 한참이고 키스했다.
―
재현이 그런 사달을 일으킨 덕분에 주연과 안 왕후가 도성이 아닌 실은 남해 어디 땅끝 마을로 내버려졌다는 사실은 호종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됐다. 누가 사주해 그리 됐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즉시 도성 안에는 주연과 안 왕후가 살기에 적당한 크기의 사가가 마련됐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 재현은 주연의 사가를 찾았다. 아무래도 궁궐 안에는 보는 눈이 많았고, 무엇보다 중전을 믿을 수 없었다.
“요즘은 무과(武科)서를 많이 보는 것 같구나.”
“예전부터 관심이 있던 거라서요.”
재현이 주연의 협탁 옆에 쌓인 서책들을 바라보며 중얼댔다. 그래, 그제랑 오늘은 무얼 했느냐? 재현이 서책을 치우고는 주연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러면 주연은 제게 있었던 일을 말해주곤 했다. 간간히 바다에서 있었던 일을 엄청난 무용담처럼 늘어놓기도 했는데, 같은 일화를 여러번 반복해서 말해도 재현은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반응해 주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 궁에서 매일 한 소리를 들었던 방정맞다는 웃음소리도 마음껏 내보였다.
“저하 집중 좀 하시옵소서.”
앞에 앉은 이조판서가 중지로 바닥을 두번 두들겼다. 매년 봄과 가을 두 번 펼쳐지는 세자교육 중 가장 혹독하다는 집중회강 기간이었다. 무엇보다 이 기간엔 궁밖으로 나가는게 엄격하게 금지돼 재현은 온몸에 좀이 쑤셨다. 13일째의 해가 넘어가는 낙조를 보며 재현은 기지개를 켰다. 서서히 푸른바다에 잠겨가는 붉은해를 바라보며 재현은 문득 주연을 상상했다. 그리고 저를 상상했다. 왜인지 그런 감상이 들었다.
집중회강 기간 동안엔 궁내 역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비슷한 시기 문과 무과 채용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새로 뽑힌 젊은 신하들이 돌아다니는 궁은 오랜만에 활력을 되찾은 듯 했다. 오늘이면 끝난다는 생각에 재현은 아침 댓바람부터 빠른 걸음으로 시강원으로 향했다. 세자를 쫓아가느라 뒤를 따르는 내관, 상궁들 역시 속도를 높여 뛰듯 걸어야 했다. 그리고 교태전과 강녕전 사이로 재현이 뭔가를 본다. 정확히는 누군가를 본다. 자리에 멈춰선다.
“저 무리는 무엇이냐.”
“무과에 뽑힌 이들입니다.”
“..그럴리가 없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재현의 목소리에 강내관이 모은 손을 떨었다. 무언가에 심기가 불편해졌거나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저, 저하! 재현이 발걸음을 돌려 성큼 성큼 열댓명의 무리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니가 왜 여깄어?”
옆으로 서 있던 얼굴을 재현이 돌려 정면으로 확인했다. 뒤에 서 있던 신하들은 그가 누군지 확인하자 예를 갖출지 말지 고개를 갸웃했다. 엄연히 말하면 대군이긴 하지만, 무과에 뽑혔으니 또 같은 신하였으니. 재현을 마주한 주연은 말이 없었다.
“여기서 무얼 하느냐고 물었다.”
“무과에 지원했습니다.”
“뭐?”
순간 주연의 사가에 쌓여 있던 무과 서책과 훈련서들이 떠올랐다. 재현이 헛웃음을 쳤다.
“무과에 들어온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네 정녕 모른단 말이냐?”
내관과 상궁들을 물린 자경전 뒷편의 좁은 무기 창고에서 재현이 소리쳤다.
“내 어머니의 협박을 받은 것이냐.”
“아닙니다.”
“거짓말, 그러지 않고서야 왜 스스로 무과에...”
“제 뜻이었습니다.”
재현이 답답한 신음을 냈다. 관직을 원했다면 제게 요청했으면 될 일이었고 그러면 문과에서 제일 편한 자리로 줬을 것이다. 다치지도, 죽을 가능성도 없는 그런 자리. 무과에 들어온다는 것은 나라에 목숨을 바치겠다는 것, 임금에게 목숨을 바치겠다는 것, 궁중에 목숨을 바치겠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언제든 명줄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는 자리였다.
“대체 넌 왜 항상..”
왜 항상 나를 이리 힘들게 하는 것이냐. 재현이 마른 얼굴을 쓸었다. 주연은 재현의 어깨가 떨리는 것을 쳐다봤다. 집중회강으로 피로가 쌓인 재현의 얼굴에 한 겹의 그늘이 졌다. 시작은 중전의 권유가 맞았다. 어릴 때 무과에 재능을 보였으니 한 번 지원해보라는 것이었다. 숨은 의도는 당연히 알았다. 중전은 저와 제 어미를 죽이고 싶어하는 제1의 인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지원했다. 언제까지 재현의 그림자 뒤에 숨어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재현은 세자이고, 왕이 될 것이고, 한 나라의 기둥이 될 사람이었다. 그는 세자빈을 맞아야 하고, 후손을 낳아야 했다. 재현의 몸은 제 것이 아닌 이 나라 백성의 것이었다.
“수운대군도 스스로 살 길을 찾으셔야지요. 언제까지나 저하가 대군만을 신경쓰고 살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모친이 염려가 많으시겠습니다.”
중전이 저와 재현이 사가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그런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저들의 애매한 사이를 우애라 굳게 믿고 있는 것도 같았다. 어쨌든 의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주연은 중전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재현이 마련해준 거나 다름없는 넓은 사가를 바라봤다.
“열심히 할 것입니다.”
“..주연아.”
“언제까지 우리가 이러고 있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
“어린날의 장난은 이제 그만두는 것이 맞습니다.”
재현이 그 말에 눈을 치켜떴다.
“장난이라 했느냐. 너는 지금까지 이 모든 것이 장난이었단 말이냐.”
“그것이 무엇이든 관두는 것이 맞습니다.”
아차 싶은 주연이 빠르게 한 발 물러섰지만 재현의 숨은 더 거칠어졌다.
너는 장난으로 나를 반긴다는 말이냐. 아니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저하는 진심인 것입니까? 아니 저하의 진심은 무엇인가요. 확인받고 싶었다. 사실은 그런 마음들을 주연은 외치고 싶었다.
“장난이라는 말이 불편하셨다면 물리겠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입니다.”
“너는 정말 네 마음만 생각하는구나.”
“저하야말로 그놈의 부채감 때문에 이러시는 거라면 관두십시오.”
악을 쓰는 태도로 주연이 말을 한다. 일주일에 두 번 밤마다 저하를 기다리고, 그러면 저하는 몰래 제 서가에 찾아오고, 곧 세자빈 간택도 하실 터인데 그러고 나서도, 정말 그러고 나서도, 계속 이런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더 이상 저하에게 챙김 받지 않아도 됩니다.”
“......”
“절 더 비참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니 저하 마음 편하자고 하는 이기적인 행동은 여기서 그만두시지요.”
“동궁전 호위무사로 뽑을 것이다.”
“그게 무슨..”
너를 내 호위무사에 뽑겠다고. 하지만 재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얼굴로 주연의 뜻을 꺼트렸다. 저하 지금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주연이 빌다시피 재현의 용포 끝자락을 잡았다.
“그래 네게 미안해서 그렇다. 우리 할바마마가 어마마가 한 짓이, 내가 한 짓이 비겁하기 짝이 없어서. 그래서 미안하지만 네 청은 받아들일 수 없다.”
재현이 엄한 목소리를 냈다. 그건 주연이 한평생 재현에게서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세자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는 제 밑의 신하들에게 수 천이고 냈을 목소리였다.
“네가 죽기까지 하면 내가 죄책감에 어찌 살겠느냐.”
용포 끝자락을 잡은 주연의 손을 재현이 끌어다 아플 정도로 꾹 쥐었다. 신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그러니 너를 내 곁에 둬야겠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재현이 던지듯 주연의 손을 놨다. 하마터면 뒤에 기둥에 손을 찧을 뻔 했다. 그리고 돌아섰다. 재현을 예전의 정의군이라 생각한 제 잘못이었다. 세자 이재현은 이제 제 한 마디로 무엇이든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죄책감’이라는 그 세 음절에 주연은 아린 심장 부근에 손을 가져다 댔다. 바보같이 뭘 기대한 건지. 그럼에도 아픔에 잠식될 것만 같았다.
―
무과 시험에서 위에서 세번째였던 주연을 임금의 처소인 강녕전이 아닌 동궁전에 배치한 것을 두고 항간에서는 되레 대군이라 차별을 당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아무래도 호종이 쫓아낸 아들을 제 옆에 두는 것은 불편했을 거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다 말일 뿐이었고, 재현의 설득이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지냈으니 편하고 마음도 잘 맞아 제 밑에 두면 좋을 듯 합니다. 보안유지도 쉬울 겁니다. 그 말에 혹하지 않을 아버지가 어딨으랴.
몇 번이고 기침을 하며 인기척을 냈는데도 이주연은 꼿꼿이 선 채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쫓아다니는 제 시선에도 곧기만 했다. 둔한 것인지 무심한 것인지 둘 다인지. 어찌 저리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지 재현은 이해가 어려웠다. 주연이 동궁전에 배치된지는 어느덧 2주가 넘어가고 있었다. 동궁전 호위무사는 3교대를 기본으로 했기에 주연을 볼 수 있는 건 사흘에 하루였다. 그래도 그 하루는 낮부터 새벽까지 주연을 옆에 붙여둘 수 있었으니 다행이었다. 무기고에서 서로 날을 세운 이후 둘 사이엔 묘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주연의 태도는 확실히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마치 과거 기억은 다 잊고 동궁을 호위하는 목표만이 머릿속에 남은 사람 같았다. 어디서든 재현으로부터 다섯걸음 떨어져 간격을 유지해 걸었고, 위험이 도사리는 곳에선 바람보다 빠르게 제 오른손으로 칼집을 쥐었다.
“내일 주연이와 교대를 바꿀 수 있겠느냐.”
“예 저하 그리 하겠습니다.”
재현이 푸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형님 일식이라는 것을 아시는지요.”
“일식? 그게 뭔데.”
“저 달이 태양을 가리는 것을 말합니다.”
열다섯 주연의 손가락 끝 손톱달이 걸려 있었다. 열여섯 재현은 처음 듣는 단어에 눈썹을 찌푸렸다.
“..신기하네. 그럼 어찌 되는데?”
“엄청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대요.”
에? 몇 초전까지 그럼 세상이 멸망하겠군.. 생각하던 재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연을 쳐다봤다. 주연은 꿈꾸는 듯한 얼굴로 하늘을 빤히 보고 있었다.
“언제 볼 수 있는데?”
“그건 모릅니다.”
“......”
“보기도 엄청 어렵다 합니다.”
“뭐 그런 게 다 있냐.”
“그래서 아름답다고 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시큰둥한 재현의 반응이 무색하게 주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상기돼 있었다. 언젠간 꼭 보고 싶습니다. 궁에서 보는 일식은 더더욱 아름답겠지요... 재현이 주연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이 태양을 가린다면 엄청 깜깜하지 않을까. 무언가를 볼 수 있긴 한 걸까. 그것은 재현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주연의 말처럼 그게 뭐든 아름다울 것 같았다.
아까부터 꿈쩍도 않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세자에 강내관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한식경 전쯤 동료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나온 심준근은 이게 다 무슨 일인가 하고 옆에 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이주연은 어디 있느냐.”
“그게..일이 있다하여 제가 나왔습니다.”
“분명 오늘 불렀을텐데.”
“그것이 이주연이 누가 가도 똑같다 하여...”
똑같아? 재현은 이를 악물었다. 대체 뭐가 똑같다는 말이냐? 그말에 준근은 입을 다물었다. 저하 하온데 이것이 다 무엇인지요. 강내관이 용기 내 물었다. 그는 모르는 듯 했다. 재현의 뒤에 줄줄이 선 신하들 도 대부분이 오늘이 개기일식이라는 것을 모르는 듯 했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재현도 서방의 어떤 서적을 읽은 주연 덕에 일식이라는 존재를 알았으니까. 그 후 궁에서 제일 유능한 실학자에게 날을 계산하게 한 건 재현만이 아는 사실이다.
“자그마치 370년이다.”
“예?”
“다음 일식을 보려면 말이다.”
재현이 문장을 마침과 동시에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나인들 몇은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하늘을 바라봤다. 야금야금 달이 커다랗고 하얀 해를 삼켜갔다. 주변은 웅성거리는 소리로 시끄러웠으나 재현만은 세상이 멈춘 것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맨눈으로 보기 어려운 것인데도 재현은 눈을 찌푸린채 그것을 들여다봤다. 눈이 시렸다. 자꾸만 뭔가 울컥하고 쏟아져나올 것만 같았다. 한편 끄트머리만 제외하고 완전히 달에 가려진 해는 동그란 모양의 붉은 빛을 화려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절경입니다 저하. 이걸 어찌 아신 겁니까?”
강내관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뭐가 절경이란 말이냐.”
“예?”
“내 석강이 끝나는대로 오늘 밤 이주연을 동궁전으로 데려오거라.”
“......”
“안오겠다면 끌고서라도 와라.”
짙은 어둠 속 돌아본 재현의 뒤로 붉은 원이 계속 빛을 발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만 보였던 풍경이 순식간에 스산해졌다. 강내관이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15년 넘게 재현을 보필하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
무릎을 꿇은 채 주연은 협탁 옆에 발화하고 있는 촛불을 바라봤다. 신종고문인지 아까부터 재현은 주연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내버려둔 채 제 할 일만을 하고 있었다. 내관과 상궁들도 물리고서는.
“저하.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시옵소서.”
참다 입을 연 주연의 부름에 재현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은은한 촛불에 서책 위로 드리워진 재현의 얼굴 그림자를 보며 주연은 저린 발을 꿈틀댔다.
“너는..내게 충성하지 않기로 마음 먹은 것이냐.”
마침내 뗀 재현의 첫마디에 주연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저하. 얇은 책장이 넘어가다가 닫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헌데 오늘 왜 나오지 않았느냐.”
“일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부르기에 소리라도 지를 줄 알았던 재현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주연이 오늘 나가지 않았던 건 어제도 당번이었기 때문이다. 자주 재현을 마주할수록 단념하기 어렵다는 걸 그는 알았기에, 어차피 돌아가며 서는 당번이라 상관없다 생각했다.
“개기일식이었다.”
네? 주연은 제가 제대로 들었나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일식은 제가 태어나 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였다. 그런데 재현이 그걸 어찌 아는 것인지. 주연의 얼굴엔 당혹스러움과 놀라움이 동시에 깃들었다.
“모, 몰랐습니다. 일식인 줄은...”
“너는 오늘이 일식인 것은 커녕 내게 한 이야기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 하구나.”
“그런 뜻이 있으신 줄 알았다면 갔을 것입니다.”
주연의 말에 재현이 조소했다. 헝클어진 앞머리를 손으로 한 번 쓸어넘겼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보폭을 넓혀 주연에게 다가갔다. 주연의 얼굴 바로 앞에 재현의 두 발이 보였다. 군신 관계라는 사실이 다시금 확연히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뜻이라..”
“......”
“아니지. 너는 내 말이면 그게 무슨 뜻이든 달려오는 것이 맞지 않느냐.”
일어서거라. 그가 주연에게 명령했다. 다리가 아파 휘청거릴법도 했지만 주연은 꼿꼿이 일어났다.
“넌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느냐.”
좀체 의중을 읽기 어려웠다. 재현은 상당히 고루한 표정으로 주연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주연은 소리 내 답을 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내게 충성하겠다는 뜻이냐.”
“예 저하.”
“그런데 내 자꾸 의심이 든다.”
“저하. 저는 동궁전 소속 무관입니다. 저하에게 충성하기로 맹세했고, 저하의 것입니다.”
저하의 것. 재현이 조용하게 주연의 뒷말을 따라 읊조렸다. 저하의 것이라... 잠시 그걸 곱씹었다. 그러더니 주연의 눈을 바라보며 가벼이 웃었다.
“그럼 네 충심도 나의 것이고,”
재현이 한 발자국 주연에게 다가섰다. 재현의 숨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 했다.
“네 명줄도 나의 것이고,”
다시 한 발 자국. 이번엔 주연의 발가락에 재현의 발가락 끝이 닿았다. 눈두덩이 점이 눈 앞에 있었다.
“네 몸도 내 것일 터,”
주연이 급한 손짓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호위무사의 복식인 검은 도포는 이미 땅에 떨어진 뒤였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재현이 주연의 허리께에 묶여 있던 매듭을 순식간에 당겨 풀었다. 안에 갖춰 입는 흰색의 저고리와 바지 내의가 드러났다. 주연이 정신이 팔린 사이 재현이 주연을 모서리로 몰아세웠다.
저하 이게 무슨.. 저고리 안으로 차갑고 기다란 손길이 느껴졌다. 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내 것이라고. 재현이 두 허벅지로 결박하다시피 힘을 썼다. 빠른 속도로 등과 허리를 쓸어대며 저를 집요하게 쳐다보는 재현의 시선에 주연은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정신이 어지러웠다. 사실은 좋았다. 재현을 만진 적이 너무 오래라 더욱 간절히 그를 원했다. 재현이 주연의 저고리 앞 매듭까지 풀어 헤쳤을 때, 주홍빛 촛불에 바닷일과 훈련으로 다져진 탄탄하고 매끈한 주연의 맨몸이 드러났다. 반대로 재현은 흉배까지 찬 채로 남색 용포를 갖춰 입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주연은 숨을 참아야 했다. 재현이 제 입술을 주연의 목덜미에 가져다댔다. 살짝 물었다 뗄 때마다 민망한 소리가 났다. 자국 자국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마치 낙인이 찍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재현의 입술은 주연의 목덜미와 쇄골께를 지나 가슴으로, 배로, 골반께로 모든 곳을 탐했다. 동시에 한 손으로는 주연의 허리 혹은 다리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주연의 살을 지분거렸다. 저하의 것이라는 말을 뱉었을 때 이런 일을 상상한 건 아니었지만..주연은 저항하는 대신 오갈데 없는 제 손으로 벽을 쓸다가 반쯤 꿇어 있는 재현의 어깨를 짚었다. 예전에 삼색이가 내던 앓는 소리가 드문드문 터져나와 커다란 손으로 제 입과 턱께를 틀어막기도 했다.
“하..저하, 그만, 그만하십시오.”
다리가 풀린 주연이 그대로 주저앉아 제 골반쯤 시선을 두고 있던 재현과 눈을 맞췄다. 욕망인지, 희열인지, 고통인지 그 어떤 감정 때문에 눈가 주위가 빨갰고 눈물이 어려있었다. 재현은 고개를 살짝 빼고는 그런 주연을 감상하듯 바라봤다. 그리고는 왼손으로 주연의 검은 뒷머리를 다정히 쓸었다. 참는 게 특기라더니 도무지 이런 건 잘 참지 못하는구나.
“주연아.”
“예 저하...하! 흐읏..”
그러다 오른손으로 주연의 허벅지와 앞섬 사이에 손을 가져다댔다. 단단하고 뻣뻣한 무엇인가를 움켜쥔다. 주연의 귓볼과 볼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만하고 말고는 내가 정할 것이다.”
재현이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과 동시에 주연의 나머지 의복마저 벗겨 바닥에 떨어뜨렸다.
―
가을의 말미라 옷차림이 두터워 다행이었다. 주연은 목끝까지 도포 깃을 올리며 목을 움츠렸다. 희미하긴 했지만 아직 사흘 전 재현이 남긴 입술자국이 목덜미에 남아 있었다. 앞에는 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조판서 옆에서 전량(錢糧)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걸어가는 재현이 있었다. 환민이 죽은 뒤 재개된 세자의 첫 도성 시찰이었다.
시찰이 끝난 뒤 재현은 풍경 아름답기로 유명한 강변을 찾았다. 시찰 내내 돌아가며 재현의 옆에서 설명을 하던 주요 관료들은 해가 지기 전 궁으로 돌아갔다. 그를 보필하는 내관 둘과 주연만 남았다. 물가 앞 자갈밭에 당도한 재현은 철퍼덕 앉아서는 뒤돌더니 주연에게 다가오라 손짓했다.
“몸은 좀 괜찮으냐.”
“예.”
“힘들면 쉬지 그랬느냐.”
“저하께서 제 충심을 의심하지 않으셨습니까. 힘들면 기어서라도 와야지요.”
말대꾸를 해놓고 주연이 재현의 눈치를 쓱 봤다. 재현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 하하, 그랬지. 그랬네 참. 하고 별것 아닌듯 웃었다. 얄미웠다. 주연이 듣고 싶은 건 그런 호쾌한 웃음 따위가 아니었으므로.
잠시고 적막이 이어졌다.
“무엇을 하느냐.”
주연이 옆에 커다란 돌을 집어다 흰색 자갈돌로 무언가를 슥슥 쓰기 시작했다.
在賢 柱延 訪...
“재현.. 주연.. 방문?”
“다녀갔다고요.”
“이런 걸 왜 적는 것이냐.”
“새기고 싶었습니다. 저하와 제 사이는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돌에 새긴 글자는 영원할테니까요.”
재현이 주연의 손에서 돌을 가져갔다.
“왜 우리는 영원을 약속할 수는 없는 것이냐?”
“그건...”
너무나 진심이 담긴 물음이어서 주연은 답할 수가 없었다. 재현의 갈색 눈동자는 영원을 약속할 수 있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묻고 있었다.
“그만 가시지요. 날이 춥습니다.”
주연이 자리를 털고 먼저 일어섰다. 그에 재현이 손에 쥐고 있던 돌을 강가에 던졌다. 커다란 파동을 내면서 통 통 통 돌이 튕겨 나갔다. 그리고 마치 이딴 건 필요 없다는 사람처럼, 주연을 바라봤다.
강변에서 궁까지는 걸어서 한식경 정도였다. 재현과 주연 내관 둘은 숲을 가로질러 궁으로 향했다. 날이 추워 도성 안엔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간간히 강아지 짖는 소리와 고양이 울음 소리만 들렸다. 장터를 지날 때도, 움막촌을 지날 때도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문을 닫은 주막을 지날 때쯤.. 뒤에서 터져나온 외마디 비명에 정신이 깼다.
그들 앞엔 정확히 경동맥이 가로로 쭉 그어진 채 피를 흘리며 쓰러진 신내관이 있었다. 주연은 반보 앞 걸어가던 재현의 팔을 당겨 제 뒤에 물리고 기다란 칼을 빼들었다. 재현도 차고 있던 중도를 들었다. 강내관은 벌벌 떨며 주연의 옆에 섰다. 신내관을 죽인 놈을 시작으로 무리 다섯이 주연 앞에 등장했다. 분신술을 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형성된 무리였다.
“비키거라.”
“저하는 가만 계십시오.”
주연의 만류에도 재현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강내관을 벽에 세운 채 주연과 재현이 검은 갓을 쓴 사내들과 맞섰다. 몇 년 전 환민과 있던 그날과 같은 기시감을 재현은 느꼈다. 제가 세자라는 걸 모르는 이들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옥색 비단 도포를 두른 저 대신 누가 봐도 무사의 복장을 한 주연에게 공격이 집중되는 것은 모순이었다. 주연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오로지 싸움에 집중하는 듯 했다. 기다란 팔과 유연한 몸놀림으로 무려 넷을 상대했다. 그들의 칼을 막고, 팔을 베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동시에 복부를 칼로 관통시키며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적에게 입히는 자상마저 아름다운 무늬같이 느껴졌다. 무예 훈련을 하는 건 본 적이 있지만 살생은 처음이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주연이 자리에서 돌아 자세를 바꿀 때마다는 검은 도포가 펄럭였다.
“조심하십시오!”
재현이 저와 붙던 한 놈을 처리하고 잠시 주연의 모습에 눈이 팔린 사이 뒤에서 갓을 쓴 남자가 등장했다. 재현이 주춤하는 사이 주연이 단박에 달려가 그 남자의 목을 베었다. 스윽 하고 베어진 목에선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와 주연의 얼굴에 튀었다. 이주연! 재현이 소리침과 동시에 뒤에 목숨이 붙어 있던 무리 중 한 명이 주연을 향해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얼굴로 주연은 달려오던 남자의 가슴팍에 칼을 꽂았다. 그대로 고꾸라진 남자는 아까 심장이 멈춘 신내관 옆에 쓰러졌다.
“구..궁에 가서 빨리 사람을 데려오겠습니다.”
강내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래, 의관과 병력을 데려와라. 재현이 지시했다. 강내관이 종종 걸음으로 떠난 자리 주연은 여전히 재현에게서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그리고 널브러진 시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손에 숨이 끊어진. 찢어진 오른팔 소매에선 피가 새 나오고 있었다.
“주연아.”
주연은 넋이 나간건지 한참이고 대답이 없었다.
“..주연아.”
다시 한 번 크기를 키워 부른 이름에 비로소 주연이 뒤돌아봤다. 달빛 아래 드러난 주연의 얼굴에는 점처럼 핏방울들이 알알이 튀어 있었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왜 그러느냐.”
주연이 두 발자국 물러섰다.
“..저하.”
“그래.”
“저하의 진심은 무엇입니까.”
이런 상황에서 긴 긴 시간 속으로 삭혀둔 질문을 묻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건 머리가 아닌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재현은 자리에서 멈춰선 채 주연을 가만 바라봤다. 그는 작게 어깨를 떨고 있었다.
“저에게선 더 이상 궁의 들풀 향기 따위는 나지 않습니다. 이제 이런.. 피비린내만이 날 것입니다.”
주연이 피범벅이 된 제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저하도 보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얼마나 오늘 잔인하게 사람들을 죽였는지 말입니다.”
또 다시 물러서는 주연에 아랑곳하지 않고 재현이 보폭을 넓혀 빠르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힘 주어 주연의 어깨를 잡았다. 순간 주연의 손에 잡혀 있던 길고 날카로운 칼이 땅에 떨어졌다. 검은 머루같은 두 눈동자는 불안감에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너는 내 것이라고.”
재현이 주연의 손목을 제 양 손으로 붙들었다. 그것은 부드러우면서도 거친 손길이었다.
“그러니 네가 죽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는 주연의 손에 칠갑된 피를 제 깨끗한 옥색 도포에 묻히기 시작했다. 주연의 손은 재현의 배에 닿았다가, 가슴에 닿았다가, 얼굴에 닿았다. 주연은 다소 놀란 숨소리를 냈으나 제 손을 맡겼다. 주연의 커다란 손을 감싸쥐고 재현은 거기다 제 뺨을 문질렀다. 두 눈을 감고 주연의 손길을 느꼈다. 그리고 서서히 눈을 떴다. 눈 앞엔 기와를 닮은, 곡선으로 올라간 가여운 주연의 눈매가 보였다. 이제 재현의 얼굴에는 주연보다 더 많은 양의 피가 묻어 있었다.
“네게서 들풀 향기가 나든, 바다 냄새가 나든, 피비린내가 나든 그런건 상관없다.”
“......”
“네가 물었지 내 진심이 무엇이냐고.”
재현이 고개를 틀어 아까부터 자꾸 땅으로만 떨어지는 주연과 시선을 맞췄다.
“나는 너를 바래.”
그것은 재현 역시 오랜 시간 담아둔 마음이었다. 재현이 길게 호흡했다. 조심스레 입술을 떼었다. 너를 볼 때마다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이 감정이 우애인지 그리움인지 동정인지 죄책감인지 헷갈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젠 알아. 난 널 그 어떤 순간에도 바래왔음을. 너의 시선을 바랬고, 너의 관심을 바랬고, 너의 애정을 바랬고, 너의 욕망을 바랬으며, 너의 몸 전부를 바라다 이젠 네 기억을 바래.
용상 위에 형제들과 번갈아 앉았다가 혼이 난 뒤 다음날 퉁퉁 부은 종아리를 매만지며 어린 재현은 대전을 바라봤다. 살짝 열린 문 틈 사이로 삼색이가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옆에 이주연. 주연이 삼색이를 잡기 위해 애쓰는 것이 보였다. 웃음이 났다.
그러니까 그날 재현이 보고 있었던 것은 왕의 자리인 용상이 아닌 주연이었던 것이다. 재현이 원하는 단 하나, 끓어오르는 듯한 마음으로 바라본 것은...
“네가 온전히 내 것이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는 재현을 주연이 두 팔로 꾹 안았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았다. 쿵 쿵 뜨겁고 강하게 박자가 울렸다. 사랑한다는 표현 따위로는 빗댈 수 없는 그의 감정이, 심장이 주연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건 말로 할 수 없는 거야. 알아? 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머리카락 한올까지 내것이길 바라는..”
주연이 재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기다란 팔을 뻗어 재현의 등어리를 토닥였다. 그 모습은 검은 도포자락에 옥색 도포가 가려지는게, 주변에 붉은 핏방울이 흩뿌려져 있는 게 마치 달이 태양을 삼키는 일식의 형상 같았다.
―
나라 안은 어느 때보다 평탄했으나 외교가 혼란한 시대였다. 한창 세력을 키우던 청나라는 조선의 북쪽 땅까지 노렸다. 곧 전쟁이 벌어질듯한 위태한 상황이었다. 호종은 나라에 있는 병력을 최대한 끌어모았으나 조선 인구의 10배가 넘는 청나라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곧 궁에는 최소한의 병력만을 놔두고 전쟁에 차출될 거란 내용의 방이 붙었다. 올해 무과 시험에서 3등으로 합격한 주연도 예외는 아니었다.
재현은 제가 가진 모든 권력을 동원해 주연의 차출을 막아보려 애썼으나, 그는 아직 세자였고, 그의 위에는 수많은 대신과 좌의정인 외할아버지, 그리고 중전인 어머니가 있었다. 반대로 출정 명령을 받은 주연은 덤덤했다. 그리고 묵묵히 받아들였다.
“무관으로서 전쟁에 나가지 않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는 일과 같습니다.”
“나에 대한 책임은 어찌하고 말이냐.”
어쩐지 칭얼대는 것처럼 들리는 재현의 말에 주연이 말갛게 미소지었다.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너를 잃을까봐 두려운 내 진심은 보이질 않는 것이냐. 주연아 나는 너 없이는...”
이제 막 진심을 들려줬는데, 고개를 돌려 들여다본 주연의 옆얼굴은 아름답고 잘생겼다. 마치 산신이 내려와 그려놓고 간 수묵화 속 미남(美男)이 있다면 필시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출정을 하루 앞둔 날 재현이 아쉬운 듯 주연의 손을 강하게 맞잡았다.
“저하. 서양에는 성탄절이라는 게 있답니다.”
“성탄절?”
“예. 제가 전장(戰場)에서 돌아오는 날 저 나무를 어여쁘게 꾸며주실 수 있을까요. 그 전까지 도착해 꼭 보러 꼭 오겠습니다.”
주연이 동궁전 한 가운데 심어진 소나무를 가리켰다. 동궁의 젊음을 상징하는 수백년된 나무였다.
“그래. 준비해놓고 기다리마. 꼭 살아 건강히 돌아와야한다. 그리고 네가 돌아오면 우리 함께..”
재현의 다음말에 주연은 조금 놀랐다가,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조하겠습니다. 저하.
진눈깨비 같던 눈은 점점 굵어져 함박눈처럼 쏟아졌다. 재현은 여전히 동궁전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25일이 끝나기까지는 한시진이 남았다.
“저하. 눈이 많이 쌓이고 있습니다.”
“아직 시간이 남지 않았느냐.”
재현이 시린손을 움켜쥐며 뒤돌아 강내관을 바라봤다. 뒤에 선 신하들은 언 발을 동동 구르며 재현의 눈치만을 보고 있었다. 괜찮은 척 했지만 재현은 제법 초조한 상황이었다. 제발.. 그리고 그때 뒤에 선 상궁 중 한 명의 눈이 커다래졌다. 저하! 저기! 재현이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엔 마법처럼,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주연이 서 있었다.
“하, 아... 주연아!”
재현이 눈발을 헤치고 주연의 쪽으로 뛰어갔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자리에 선 주연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재현은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주연을 세게 끌어안았다. 전쟁터에서 막 돌아온 주연에게선 피비린내 따위 나지 않았다. 오로지 주연의 냄새, 주연의 향기, 그것만이 날 뿐이었다. 재현의 것이 된 주연의 체취가. 둘은 그렇게 25일이 지나도록 한참을 끌어안은 채 동궁전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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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어떤 역사서에도 적히지 않은 기록.
참 이상한 시대였다. 세자가 죽었고, 세자가 되어야 할 대군이 밀려났으며, 그 자리를 뺏은 세자는 도망을 갔으니 세자 책봉만 몇 번을 한 시대였다.
1884년, 그것이 공식적인 기록이지만 1882년 이미 동궁전에선 성탄절을 축하하는 자리가 벌어졌다. 당시 세자이던 이재현과 적통왕자 출신인 수운대군 이주연이 그 자리에 있었고, 내관 둘과 상궁 셋, 나인 다섯이 그 광경을 함께 보았다. 참으로 잊기 어려운 풍경이었다고 모두들 입을 모아 증언했다.
그리고 정의세자에 대한 기록은 여기서 끊긴다. 며칠 뒤 그는 사라졌다. 결국 이렇게 됐다며 소리를 지르던 중전의 목소리만이 궐에 울려퍼졌다. 백방으로 살폈지만 그 누구도 세자를 찾을 순 없었다. 함께 사라진 건 수운대군. 둘이 어디로 갔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마치 둘만 증발된 것처럼...
기어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영원토록 함께 할 거라는 것. 그 사실만이 확실할 뿐이었다.
기어이(期於이)
: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