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또 차였냐? 이재현은 축 늘어져서 잔 홀짝이고 있는 이주연을 보며 헛웃음친다. 또 차인 건 아니거든요 이번엔 제가 찼거든요. 이주연이 발끈해서 말한다. 또차잏겋아니거듷옇이벟에제가찼거듷혀. 이재현 귀엔 이렇게 들려서 별 타격도 없었다. 솜사탕 발성 귓가에 닿자 간지러울 뿐인 이재현은 귀 후비적대며 자연스레 옆자리의 의자를 빼 앉는다. 그땐 걔가 먼저 차달라고, 그게 마음 편할 거 같다 지랄해서 너가 차준거라매.
"니가 차인 거지 결국."
촌철살인 발언. 이주연은 말없이 이재현을 노려본다. 형 진짜 싸가지 없다아... 너보단 나을걸. 자연스레 이주연 손을 감싸 잔 가져다가 한 모금 마신 이재현이 푸흑하고 마신 액체를 다 뿜어낸다. 바텐더는 익숙하단 듯 이재현 입에서 텨 나온 술을 슥슥 닦는다. 너, 너 이 미친, 도수가 몇 도야 이게 라이터 키면 입에서 폭탄 터지겠는데 지금? 어쩐지 지금이 첫잔인 거 같은데도 지나치게 꽐라된 이주연이 단번에 이해 간다. 그래도 여기까지 나와준 의리는 지키자 싶어 고개 기울이며 운 뗐다.
"어느 행성 사람이랬지?"
"몰라요... 하노 행성 쪽이었는데. 시골 출신이었어요. 하노 밑에, 무슨 242 다시 A 다시 522였나 하는 행성..."
"완전 깡시골이네. 어쩌다가 만났냐?"
"지구에서, 오로라 보고 싶길래 우주선 끌고 북극 갔다가 만났어요..."
"설마 쫑파날?"
이주연이 고개를 꾸닥인다. 네, 태배생ㅡ태양계로 배우는 우주의 생태계라는 교양 과목이다ㅡ시험 끝나자마자 쌩쌩이ㅡ이주연 우주선 애칭ㅡ끌구 갔어요. 시험 문제 중에 지구의 자기장 관련해서 오로라 어쩌고 하길래 갑자기 너무 보고 싶어져서... 이유도 이주연답다. 늘 먹고 싶어서 먹고, 자고 싶어서 자고, 가고 싶어서 가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이주연과 딱인 그런... 그나저나 쫑파날 연락 안 돼서 뒤지게 걱정했더니 지구까지 처 기어 가? 가서 애인을 사궈? 많이 취했나 걱정돼서 아무리 연락해도 안 받아서 수수료 내고 위치까지 연결해봤었다. 그러자 통신권 밖인 이주연에 머리 싸매고 애가 갈만한 곳 전부 돌아댕겨본 이재현이 주먹을 꽉 쥔다. 그래도 참자, 참자...... 일단 이야기나 잠자코 듣자 싶다.
"원래는 남극에 가려고 했는데, 좌표 헷갈려서 북극으로 도착했거든요."
"어야."
"근데 마침 똑같은 타이밍에 똑같은 위치로 같이 도착한 다른 우주선이랑 교통사고가 난 거예요."
"뭐?????????? 안 다쳤어???????????????????"
"보시다시피 멀쩡. 큰 건 아니었고옇, 쌩쌩이 뒷 철판 전부 갈고 뒷 본체 에어백까지 전부 터진 정도..."
"존나 크잖아 미친 새키야! 어디 봐. 다친 곳 진짜 없어?"
이재현이 이주연 얼굴을 답삭 붙든다. 쪼매난 얼굴 요리조리 돌려가며 살피다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한 거 확인하고 나서야 정신이 차려졌다. ...아레레. 이대로 1cm만 더 간다면 입술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얼굴 상태, 늘 이 앞을 지키던 바텐더는 어째서인가 사라져있고, 나름 북작거리던 술집 내부는 조용하며, 저와 이주연에게 꽂히는 수많은 시선들...... 무엇보다 새빨개진 이주연의 얼굴. 이재현은 아차 싶어 붙들었던 손을 놓고 큼큼인다.
"지, 진짜 안 다쳤네, 다행이네... 여튼, 그래서?"
"어, 어어... 그래서... 나가보니까 생긴 거 꽤 괜찮길래 꼬셨죠. 그대로 텔 가고, 처음엔 제가 박았는데 중간부터는 제가 박혀서 총 다섯 번 하고..."
"스탑, 스탑. 그렇게까지자세히안궁금해제발주연아쫌...... 그러다가 사귀게 됐다고? 근데 왜 헤어진 건데?"
"자길 안 사랑하는 것 같다나 뭐래나. 제 눈이 텅 비어있대요."
"음."
"왜지? 형은 항상 제 눈 반짝거린다고 하잖아요."
이번엔 이주연이 먼저 냅다 얼굴을 들이민다. 이재현은 잠시 당황하다가도, 아직 빨개져 있는 이주연의 귀를 보고 요것 봐라? 싶다. 지도 부끄러우면서 사람 꼬시려고 별 짓을 다 하네 지금. 황당하다 못해 괘씸하기까지 한 이재현은 썩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이주연에게 얼굴을 더더욱 갖다 댄다. 그르게, 눈 반짝이는 거 하면 또 이주연인데. 잘 헤어졌네. 어? 두 콧잔등이 스쳤다. 애써 진정한 얼굴 또 한 번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이주연이 결국 먼저 시선을 피한다. 고개를 확 떼내면서 히이잉... 따위의 소리를 내며 자리에 축 늘어진다. 형 진짜 못됐어.
"한두 번이냐."
"왜 나 안 만나줘요?"
"오, 웬일로 직구."
"형도 나 좋아하잖아. 내가 맨날 걱정되잖아. 내가 다치면 형 가슴은 찢어지는 거 같잖아."
"가슴 정도가 아니지... 세상 무너지는 기분? 그 정도?"
댑따 큰 형 가슴이 무너지나 세상이 무너지나 딱히 상관은... 암튼, 근데 나 왜 안 만나주냐고요. 볼멘 소리에 이재현은 뒷목 긁적이더니 그런다. 상식적으로 주연아 우리 나이에 아카데미 다니면서 우주선까지 있으면 사람들은 뭐라고 하냐 보통. 금수저요. 너는 걍 금수저도 아니고 행성 장관님 아들래미잖어. 근데요. 근데는 뭔 근데야 너같은 다이아 수저랑 학비 없어서 밤마다 광물 캐러 노가다 뛰는 흙수저랑 어울린다고 생각하니. 네.
"그래? 근데 형은 아니야."
이쯤이면 의리 충분히 지켰다 생각하는 이재현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허탈한 표정의 이주연은 망설임없이 일어나는 이재현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이재현의 손을 붙든다. 정확히는 손도 아니고 소매 끝을 조심스럽게. 어쩐지 주눅 든 손길에 신경 쓰인 이재현이 멈춰 서면, 이주연은 천천히 일어나 이재현의 목에 제가 하고 있던 목도리를 감아 준다.
"날 추워요."
"..."
"표정 왜 이래? 형 말마따나 형한테 까인 거 한두 번인가."
오늘 영하래요. 걍 이건, 최소한의 도리로써... 추울까봐 이러는 거니까. 잘 하고 댕겨요. 거절하지 말구.
목도리에선 이주연의 향수 냄새가 가득했다. 이재현은 그 향을 싫어해서 매몰차게 벗어버릴까 하다가, 싫어하는 향 사이에 이주연 살냄새를 맡고 한 번 져주기로 한다. 그래서 얌전히 있었다. 이주연이 목에 감아주는 대로.
열번 불켜 안 켜지는 트리 없다
이주연 말대로 날은 뒤지게 추웠다.
바에서 나오자마자 찬바람이 온몸을 강타해서 이주연이 싸매준 목도리를 끌어와 얼굴을 파묻었다. 천왕성에서 온 바람이랬나... 아무리 신행성 전체에 열 배리어 쳐 놨어도 한겨울 추위까진 막지 못하나보다. 이주연 냄새 폴폴 풍기는 목도리에 코박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휙휙 지나간다. 고개 들면 어두운 하늘 아래로 가지각색의 자동차들이 날아다닌다. 우주선이라고 불리우는 그거.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이재현네 집은 잘 살았다. 막 부자까진 아니었고 옛날 기준 평범한 중산층 가정 정도. 비단 이재현 집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거의 다 그랬다.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이 도래하자 마음에 여유가 생긴 사람들은 편안했다. 날이 갈수록 국민들 행복 지수는 높아져만 갈 때, 일이 터졌다. 인간들은 다 같이 잘 사는 것에 만족을 못 했다. 그 뒤로 전쟁이 일어났고, 유례 없는 일에 가족 잃은 사람들 우후죽순 생겨났단 게 불과 십 몇 년 전 역사의 이야기. 그중 이재현은 가족들을 전부 잃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았다.
이재현은 본인 인생 따위 딱히... 비관하지 않았다. 가족 잃은 아픔은 거의 전국민이 품고 있는 슬픔이었다. 본인 몸 하나도 건사 못해 만신창이 된 사람들도 많았다. 남이 죽을 병 걸렸다고 문지방에 찧은 내 발가락이 안 아픈 거 아니라지만, 어쨌든 '남들도 다 가지고 있는 슬픔'이라는 부분이 이재현을 위로케 했다. 목숨 하나 멀쩡히 건진 것만으로도 다행이니까... 근데 이주연 만나고 바뀌었다 그게. 든든한 빽 하나 없이도 아득바득 돈 벌어다가 아카데미 다니는 이재현의 떳떳함을, 자부심을, 자꾸만 작아지게 만들었다.
이유는 이주연이 저를 좋아해서.
더 큰 이유는, 저도 이주연을 좋아하게 돼서.
엠티 날 분위기 타서 키스하고 깨달았다. 쌍방이니까 사귀면 되지 않겠냐는 이주연 말에 이재현은 고개 저었다. 왜? 이주연의 허탈한 표정에는 답지 않게 횡설수설했다. 요약하면 넌 잘 살고 난 못 사니까. 우리 집안 그런 거 신경 안 쓴다는 이주연의 말에도 이재현은 그냥... 두려웠다. 이재현은 쓸데없는 부분에서 생각이 너무 많았다. 겁쟁이. 이주연이 말했다. 이재현은 발끈하려다 말고 고개 숙였다. 맞았다 겁쟁이. 이주연은, 그런 이재현이 정말 단 하나도 이해 안 갔지만 존중하기로 했다. 이재현을 기다려주기로 했다. 이주연은 분명 봤기 때문이다. 이재현이 키스할 때 허벅지가 불룩했던 걸...... 여차하면 잡아 먹고 책임지라 할 생각이었기에.
이주연의 살내음에 파묻혀 이대로 집 가서 쉬려던 이재현은 발걸음을 틀었다. 살 냄새가 너무 혼미해서였다. 그대로 집에 갔다간 몇 발 빼고 현타 지릴 것 같았다. 이주연과 성애적으로 엮이는 건 그때 키스 한 번이면 충분하다. 별안간 아까 들었던 이주연의 성생활 이야기가 떠올라 광물 캐다 말고 장갑 벗어 귀를 벅벅 긁어냈다. 웬일로 농땡이 피우냐는 김씨 아저씨의 너스레엔 이 악물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만 보면 이주연 그것도 진짜 웃기는 놈이었다. 우린 안 된다는 이재현의 말에도 포기 않고 계속 꼬셔대면서 그런 얘길 막 하고... 확실히 이주연이 섹시하게 생긴 건 맞다. 남자가 봐도 섹시하게 잘생겼다. 근데 섹시한 것보단 귀여운 게 컸다. 이주연은 이재현 앞에서 귀여운 얼굴을 더 많이 했다. 남들 앞에선 씨익 웃다가도 이재현 앞에선 헤실 웃는 그런 게 있었다. 그래서 이주연이 그런 얘기 할 때마다 이재현은 면역 없이 기겁을 하게 됐다. 지가 먼저 박았다가 뒤에는 박혔댔지. 이주연은 뭘로 더 느낄까? ...까지 생각했다가 이재현은 이윽고 제 뺨을 한 대 내리쳐 결국 김씨 아저씨에게 호통을 들었다.
계속되는 이상 증세에 김씨 아저씨는 그만 가서 쉬랬다. 일당 안 까고 그대로 주겠다기에 이재현은 곧장 퇴근했다. 한밤 중인데도 길거리는 반짝거렸다. 상점마다 내놓은 트리에 불이 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조만간 크리스마스다. 서류 떼느라 잠깐 들린 아카데미에서도 핫토픽이었다. 크리스마스날 뭐 할 거냐는 질문. 이재현은 당연히 일 할 예정이었다. 공휴일에는 일당이 1.5배인데 당연했다. 어차피 저는 애인도 없고...
이주연은 그날 뭐 하려나? 음, 보나마나 또 클럽 하나 빌려다가 아카데미 학생들 죄 초대해 문란난교파티나 벌일 게 뻔했다. 이주연 성 생활은 아카데미에서도 유명 인사였다. 원래도 유명했는데 이재현이 이주연 까고 나서 더 심해졌다. 이재현은 의외로 개방적인 면이 있어서 그러는 이주연을 그냥 냅뒀다. 걔도 성인이고, 뭐 알아서들 잘 할 테니까... 라고 생각하면서도 턱에 선 하나가 그여졌다. 주먹에 힘도 들어갔다.
집 도착하니 이주연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 뭐 해요
- (사진)
- 흙수저인 누구한테 목도리 적선하느라 너무 춥네 ㅎ
- (사진)
- 추워
보낸 사진은 두 개 다 셀카였다. 하나는 또 눈 요상하게 내리뜨고 반팔만 입은 채 누워있는 셀카, 하나는 거기서 휑한 목덜미만 조금 더 확대한 요상한 셀카. 이재현은 황급히 사진을 닫았다. 둘 다 요상한 건 마찬가지였다. 추우면 옷을 입어 양아치 새키야, 라고 보내려다가 벗어놓은 목도리가 눈에 띄었다. 덕분에 안 춥게 왔으니 조금 순화해서 '옷 입으셈' 으로 답장했다. 답장 보내자마자 전화가 걸려온다. 이재현은 망설임 없이 받았다. 뭐 해요? 방금 퇴근하고 집 들어왔다. 피곤하겠다. 알면 끊지? 그건 싫은뎋. 이제 씻을 거야. 오ㅎ 영통할래요? 지랄 노. 이잉...
......이잉? 되도 않는 앙탈에 잠깐 심쿵한 이재현이 얼굴을 쓸어내린다. 쓸데없는 소리나 삑삑하던 이주연은 이게 목적이 아니었다는 듯, 답지 않게 기침 몇 번 하더니 긴장한 목소리로 묻는다.
[크리스마스에 뭐 해요?]
"일해야지. 일당 더 쳐줘."
[낭만 없다.]
"낭만이 밥 맥여주니."
오, 방금 형 진짜 어른 같았어요. 하면서 감탄하는 철부지. 이재현은 츄리닝 바지 훌러덩 벗으며 마무리 멘트 쳤다.
"할 말 더 없으면 끊는다."
[아, 잠깐만. 잠깐만.]
"뭔데."
[크리스마스 날... 저랑 놀면 안 돼요?]
"흠. 뭐 하고?"
어? 이주연이 낸 소리다. 단칼에 거절할 줄 알았던 이재현 입에서 여지가 튀어나오자 잠깐 렉 걸린 이주연은 띄엄띄엄 말했다. 어, 어어... 일단은, 남극 가서 그때 못 봤던 오로라도 같이 보고요, 화성 가서 밥도 먹구... 당황해서는 어물쩡대는 이주연을 기다리며 이재현은 허헉 웃었다. 데이트 아냐 그거? 아뇨 그냥 친목도모예요. 웬일로 먼저 선 긋네. 데이트라고 하면 형 안 나올 거잖아요. 친목도모라도 나갈 생각 없는데. 아아, 쫌.
"주연아. 근데 형 그날 진짜 일해야 돼."
[...그러면은,]
"또 돈 빌려주겠다는 말 할 거면 끊자."
[...]
"아니어도 끊고. 형 바지 벗고 있은 지 몇 분 됐어. 추워."
알았어옇... 하고 힘 빠지는 목소리를 내면서도 전화는 안 끊겼다. 이주연은 항상 그랬다. 이재현과의 통화에서 먼저 끊는 일이 없었다. 이재현은 그런 이주연 대신 냉정하게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다. 뚝.
끊어진 화면을 한참 바라보던 이재현은 웃통도 마저 벗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
그렇게 일 할 거라고 이주연에게도, 제 자신에게도 신신당부 했던 크리스마스 당일 아침.
"...괜찮아?"
"괘, 콜록, 괜찮, 켁, 괜찮아, 쿨럭..."
"야, 야. 말하지 마. 형이 미안."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가...... 이재현은 얼음물 담긴 바구니에 푹 적신 수건을 물기 쫙 짜서 이주연 이마에 얹는다. 협탁 위 놓인 체온계의 숫자는 38.7도. 새빨갛게 달아올라 더운 숨 쌕쌕 내쉬고 있는 꼴 보자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새벽 일찍 눈 떠서 용역소로 향하려고 주섬주섬 옷 주워 입는데 연락 한 통 왔다. 발신인 이주연. 막상 받아보면 또 일 잘 다녀오라는 시답잖은 이야기나 늘여 놓을 게 뻔했다. 때문에 가볍게 받았는데 무언가 이상하다. 주연아. ... 이주연? 재촉해 부르자 색색 대는 숨소리가 토해져 나온다.
[...형, 나, 아파, 아파요...]
그 말에 택시까지 타고 달려간 이재현이었다. 구라일 가능성은 배제하고 봤다. 이주연은 온갖 걸로 이재현 신경 쓰이게 한들 아픈 걸로는 장난 안 쳤기 때문이다. 원래는 뭐만 해도 아파요오 하고 앙탈 부렸는데, 언제 한 번 이재현이 꽤 취해서 가정사 짧게 얘기한 이후로는 일절 안 그랬다. 이재현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도 그랬다. 의외로 섬세한 면이 있어서...
예전에 궁금하지도 않았는데 지가 먼저 알려준 자취방 비번ㅡ이재현 생년월일이다ㅡ따고 들어갔더니 집안이 온통 춥다. 나한텐 따뜻하게 하고 다니라면서 지는. 급한대로 보일러부터 틀고 방문을 열자 침대 위 이불이 불룩하다. 무슨 강아지 낑낑대는 소리도 들린다. 황급히 이불을 걷자 잔뜩 몸 웅크린 이주연이 우응 댄다. 주연아 이주연. ...형? 어 형이야 너 언제부터 이랬어. 몰라 몰라요 눈 뜨니까... 말 못 다한 이주연이 또다시 콜록대자 이재현이 다급히 애 등을 토닥이며 진정시킨다. 어어, 알았어, 대답하지 마, 괜찮아......
대충 꼬라지 보니까 밤부터 이런 것 같은데. 그것만으로도 이재현은 속이 답답했다. 이주연은 선을 지킬 줄 알았다. 늘 막무가내였어도 이재현이 기꺼이 감당해 줄 만큼만 꼬장 부렸단 얘기다. 잘 시간 배려해서 날 터올 때까지 혼자 끙끙대다가 이재현이 눈 뜰 때 돼서야 간신히 전화한 게 뻔했다. 여기서 꼬장에 해당하는 부분은 분명 주위에 사람도 많을 텐데 딴 사람 안 부르고 굳이 이재현을 불렀다는 거. 그거다.
이재현은 아픈 사람 보살피는 방법을 잘 알았다. 제 가족들 때문이었다. 차라리 단숨에 죽기라고 했음 고통 없이 갔을 텐데 하나같이 다쳐서 아파하다가 죽었다. 수발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이재현이 낑낑대며 다 했다. 헛소리하며 숨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이재현이 지켰다. 이주연이 아픈 걸로는 이재현 안 건드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때 꽤나 취했던 이재현은 이 모든 이야기를 눈물 하나 없이 무덤덤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남의 이야기하듯.
이마를 대충 짚어보니 뜨끈뜨끈했다. 이제 막 실내로 들어와 아직 차가운 이재현 손이 좋은 건지 이주연은 끙끙대며 얼굴을 부빈다. 안쓰러워서 볼 몇 번 토닥여 주고는 협탁 아래 서랍을 뒤졌다. 나온 작은 구급상자에 기본 상비약 정도는 구비돼 있었다. 이재현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물을 떠왔다. 이주연에게 반으로 쪼갠 해열제를 두 번에 걸쳐 먹이고 나서는 이불을 푹 덮어줬다. 구급상자 옆에 있던 체온계로 열 재보니 38.7도로 펄펄 끓었다. 이재현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수건도 얹어주기 위해서였다.
이주연이 이재현에게 목도리를 둘러줬던 날. 그때 그걸 그냥 하고 와서는 안 됐다. 애 눈빛이 안쓰러워서... 그거라도 안 하게 해주면 울 것 같은 눈이라 잠자코 했었다. 아니, 사실은, 그 안에 담긴 이주연 마음이 좋아서 그렇게 했다. 이주연이 자신을 챙겨준단 사실이 좋았다. 이재현은 자책하며 머리를 싸맸다. 이주연 이 쌔끼 춥게 입고 다니는 거 알면서도 미처 생각을 못했다. 배경 차이 무서워서 밀어내는 주제에, 요 안하무인 애새끼가 주는 달콤한 애정에 푹 빠져들어서는. 그때부터 이주연의 감기 기운은 시작된 거였을까.
다행히 약 먹은 이주연은 금방 잠들었다. 지쳐서 실신한 듯한 몰골에 속이 탔다. 물수건을 계속해서 갈아주고, 드러난 살갗을 계속해서 닦아내며 열 식혀주던 이재현은 자신이 전도체가 된 것 같다고 느낀다. 이주연을 돌봐주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제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터지기 직전의 귀끝을 만지작 대면서도 이주연 몸에 나는 열이 죄다 제게로 왔으면 좋겠다, 제가 대신 아파주고 싶다.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또 했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였다.
이주연은 한 번도 안 깨고 내리 잤다. 아까보단 편안한 얼굴로 눈 감고 쌔근쌔근 잠든 꼴 보니 조금은 안심이었다. 건드린 탓에 웅얼대는 애 달래가며 다시 열을 재자 37.7도랜다. 정확히 1도 내려갔다. 식혀지긴 한 게 다행인데... 지금도 낮은 건 아니라 이재현은 입술을 깍 깨물었다. 행성간 이동도 가능한 시대에 사람 열 한방에 내리게 하는 게 안 나왔다는 게 말이 되나.
더 재우는 게 최선이긴 한데 애 밥도 맥여야 됐다. 쌀 불려다가 죽 끓인 이재현은 이주연을 조심스레 깨웠다. 종일 물수건 갈아주느라 부르튼 찬 손으로 이주연의 볼따구 곳곳을 문질렀다. 우응거리며 뒤척이던 이주연이 눈을 슬며시 뜬다. 형...? 어야 형이야 밥 먹자 주연아.
냉장고에 조금 남은 야채 박박 긁어다가 끓인 야채죽이었다. 적당량을 던 죽을 후후 불어다가 입술을 댔다. 적당히 뜨끈하다. 다시 간장 조금 찍어다가 이주연 입에 디밀자 저항 없이 받아먹는다. 푹 끓인 죽인데도 뭐가 씹을 게 있는지, 한참은 오물거리다 삼킨다. 땡땡히 불은 볼따구 오물거리는 거 보니 마음이 좀 놓였다. 정작 이재현 본인은 죙일 공복이면서 그랬다.
꿀떡꿀떡 다 받아먹은 이주연은 멍한 눈으로 이재현을 쳐다봤다. 말은 없었는데 뭔 생각을 하고 있을지 예측이 됐다. 이재현은 그 시선을 견디며 차려왔던 상을 치웠다. 설거지까지 마치고 다시 방으로 가니 이주연은 아까 그 자세 고대로 앉아있었다.
"누워서 더 자. 너 아직 열 안 내렸어."
"...일은요?"
"출근길에 너 연락 받고 바로 달려왔지, 인마."
아, 저 때문엫... 이주연이 말끝을 흐린다. 이재현은 분명 제가 그은 선이었음에도 칼같이 지키고 안 넘어오는 이주연에 약간의 불만을 가진다. 아플 땐 마냥 투정 좀 부리지... 모순이었다.
"아프지나 마."
"..."
"아프면, 어리광 좀 부리고..."
형 그정도로 매몰찬 사람은 아니다. 아직도 몸 일으키고 있는 이주연을 눕히며 말했다. 말해놓고 지도 아차했다. 맨날 선 그어 놓고 아플 땐 봐주겠다는 말. 내뱉는 지도 이게 뭔 말인가 싶은데 이주연 표정은 어떨까. 차마 볼 용기가 안 나 이불이나 토닥이며 정리해줬다. 문제는 굳이 쳐다보지 않았어도 곁눈질로 보였다, 이주연의 땡그란 시선이. 이재현은 곱슬기 가득한 머리 멋쩍게 긁으며 말했다.
"부탁할 거 있음 해. 편하게."
"...베란다 구석에 있는 박스 열면, 트리 하나 있거든요? 좀 큰데..."
"어야."
"그거 좀 거실에 꺼내 줄 수 있어요?"
오늘 크리스마스니까... 말하면서도 말끝 흐리며 눈치 보는 꼴에 이재현은 또다시 심장이 욱신거린다. 아프더니 애가 왜 이리 과하게 소심해졌지. 아무래도 이재현 일 못하게 된 부채감 때문에 그런 듯 했다. 저 성격이랑 저 재력에 분명 사례금이라도 주고 싶어할 텐데 이재현은 그런 거 제안하는 것조차 불쾌하게 느낄 테니까.
"아픈 놈이 크리스마스란 자각은 있었어?"
"당연하죠... 일 년에 한 번 뿐이잖아요."
이재현은 결국 피식 웃으면서 이주연 머리칼을 헝클여뜨렸다. 그리고 이마에 엉겨 붙은 앞머리를 슥슥 넘겨주며 말했다. 누워서 푹 자고 있어 눈 뜨면 트리 보게 해 줄게. 이주연은 여전한 요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살풋 미소 지었다. 차오른 애굣살 보고 있자니 덩달아 기분 요상해진 이재현은 몸을 일으켰다.
*
좀 크대서 커봤자 얼마나 크겠어, 했는데 트리는 정확히 이재현만했다. 아니, 저보다 조금 더 클지도... 상자 크기부터 짐작했어야 됐는데 꺼내는 것조차 일이었다. 심지어 장식품 다 달려 나온 편한 트리가 아니라, 하나하나 일일이 매달며 전구까지 감아야 되는 화목한 온가정용 트리였다.
거실 한복판에 내놓는 것만으로도 진 싹 빠진 이재현은 소파에 늘어져 꺼낸 트리를 잠자코 바라봤다. 폼 보니 더러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새거인 것 같지도 않았다. 적어도 몇 년 이상 추억이 묻어있는 듯한 물건... 가만히 앉아 트리 연도값 매겨보던 이재현은 슬쩍 사연이 궁금해졌다. 어디서 구한 트리일까. 이주연네 가족이 쭉 쓰던 걸까? 이주연은 저 큰 걸 붙들고 혼자 꾸미려고 했던 걸까? 아니면... 같이 꾸미고 싶었던 상대가 있나. 열 끊는 중에도 크리스마스 하나 안 까먹고 챙기는 이주연의 얼굴이 떠오른다.
곰곰이 생각했다. 이재현은 트리 같은 거 만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땐 부모님이 미니 트리 거실에 꺼내놓으신 게 다였고, 커서는 당연하게도 만들 기회 따위는 없었다. 애당초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근데 이주연은 이 나이 먹고도 트리를 챙긴다. 이재현은 여기서 이주연에게 거리감을 느낀다. 이번엔 유복함의 차이로 인한 거리감이 아니라... 그냥 선천적인 차이라고 느꼈다. 그게 성격일 수도 있고, 뭐가 됐든지간에 사람 생겨 먹은 게. 이재현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저와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이주연을 더 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재현은 트리에 전구부터 감았다. 장식품들 같은 건 바로바로 집을 수 있도록 옆에 잘 세팅해두었다. 말했듯이 트리 같은 거 만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전구 감는 거 하나만으로도 한참 걸렸다. 그래도 나름 그럴싸하게 걸어내는데 성공하고 전원을 키니까 이번엔 불이 안 들어왔다. 베란다 뒤져보니 공구함 있길래 납땜까지 하고 나서야 모든 세팅이 끝났다. 이재현은 거실 불을 껐다. 불 키고 있을 땐 몰랐는데 끄니까 어느새 밖도 캄캄해졌단 것을 깨달았다. 손목 타이머를 확인하니 벌써 밤이었다.
어찌 됐든 드디어 전구의 전원을 연결시켰다. 여러 개의 노란 불이 확 들어오며 어두운 거실을 밝혔다.
"우와아..."
이재현이 낸 소리가 아니었다. 뒤를 돌자 이주연은 언제 나왔는지 이불 칭칭 두른 채 트리보고 감탄하고 있다. 이재현이 좋아하는 그 반짝이는 눈을 하고서. 쟤 열은 내렸나? 황급히 다가간 이재현이 이주연 이마를 짚어본다.
"열은 많이 내렸는데... 더 누워있지 그래."
"답답해요. 이제 잠도 더 안 오고."
"머리는 괜찮어?"
웅. 꼬박꼬박 대답하면서도 시선은 트리에 고정이다. 트리 처음 본 고양이마냥 구는 꼴이 귀여워서 이재현은 얼굴 쓸어내리는 척 하며 웃음을 참았다.
"근데 장식은 왜 꺼냈어요? 그냥 전구만 밝혀도 됐는데."
"너 일어나면 같이 꾸미려고."
"...엫?"
크리스마스잖아. 양말 소품 하나 들어다가 이주연 손에 쥐여주며 그랬다. 멋쩍은 거 티내면 더 멋쩍어질까봐 아무렇지도 않게. 아까 한바탕 올랐던 열기운 좀 가신 이주연은 맹하니 있다가, 살풋 웃었다. 손에 쥔 양말을 눈 앞 트리에 걸더니 이윽고 환하게 웃는다. 그 뒤론 알아서 세팅한 장식품 주워다가 잘 걸길래 이재현도 같이 트리 꾸미는데 집중했다. 형 거기보단 여기가 더 낫지 않아요? 아 진짜 이주연. 특유의 허세로 아는 체하는 이주연은 지나치게 귀여웠다. 이재현은 툴툴대면서도 이주연이 조종하는 대로 트리를 꾸몄다. 티키타카 몇 번 하자 트리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입술까지 쭉 모아가며 장식 다는데 집중하던 이주연이 불쑥 질문을 한다. 이 트리 어디서 났는지 알아요?
"모르지 나야."
"어렸을 때 가족들이랑 매년 크리스마스 이브마다 트리를 꾸몄거든요, 거실에 이렇게 꺼내다 놓고."
"응."
"형이 해놓았던 것처럼 아빠가 밑에 다 세팅해놔서, 우리는 장식만 달면 되게..."
"그래 아들아."
짐짓 엄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로 그랬다. 뭐야앟 징그러. 이주연이 꺄르르 웃는다.
"여튼, 매년마다 그랬었는데, 전쟁... 난 이후로는 한 번도 꾸며본 적이 없었어요."
"왜?"
"아빠가 바빠지면서... 약간, 집안 분위기도 되게 삭막해졌거든요."
물론 제가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라서 그랬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저는 항상 그때가 그리웠었어요. 그래서 자취하느라 짐 옮길 때 구석에 처박혀있던 트리도 제가 가져온 거예요. 안 버리고 두면 다시 꾸밀 날이 오지 않을까 싶어서...
"근데 형이랑 지금 이러고 있으니까, 진짜 신기하다."
형한테는 너무 미안한 소리인데, 어, 음... 저 지금 진짜 행복해요. 저게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끙끙 앓던 놈이 할 말인가. 몇 분 전부터 말이 없어진 이재현에 이주연은 그제서야 상대를 살핀다. 아 또 선 긋겠네, 괜히 말했다... 자책하며 손가락 꿈지럭대던 이주연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진다. 인지할 새도 없이 딱밤 콩. 아얗.
"아픈데 뭐가 행복해. 형은 너 아파서 안 행복해."
"하핳..."
"형도 행복하게 하고 싶음 내년 크리스마스엔 아프지 마."
"네에."
"그래야 내년에도 아빠 노릇 해 줄 거야."
"...웅?"
놀란 듯 눈 깜빡이는 이주연이다. 이재현은 이번엔 돌려 말하지 않고 직구 친다. 여전히 반짝이는 이주연의 눈을 바라보며, 웃으면서 말한다.
"내년 크리스마스도... 같이 보내자고 주연아."
전날 이브에 만나서, 트리 먼저 꾸미고. 저번에 전화로 뭐랬더라. 남극 가서 오로라 보고, 화성 가서 밥 먹는다고? 그거 다 하자고.
"...이거, 제가 원하는 대로 알아 들어도 되는 거 맞죠?"
되묻는 말에 이재현은 어깨 으쓱. 너 아픈 거 보니까 튕기는 짓도 못해먹겠다 싶...어억. 말 끝남과 동시에 품안에 이주연이 밀려온다. 와락. 순식간에 가슴팍에 들어찬 이주연에 이재현은 잠시 당황하다, 곧 안긴 이주연의 등을 끌어안는다. 이주연은 가만히 그 손길 느끼다가 문득 맞닿은 단단한 이재현의 허벅지가 엠티날과 같이 불룩하단 것을 깨닫고 웃었다.
열심히 꾸민 트리는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주연의 눈동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