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은 꾸준히 숫자를 셌다. 벽에다 적을 때도 있었고 여의치 않을 경우엔 땅에 숫자를 적어 두었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그들이 머무는 거처는 바뀌어 그 숫자들을 지켜낼 수 없었음에도 그랬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재현은 숫자를 셌다. 주연의 옆에 누워 한 팔로 머리를 받쳐 주며 남은 손으론 주연의 몸에 문신을 새기듯 숫자를 덧그렸다. 주연은 묘하게 웃음을 머금은 재현의 얼굴을 보며 따라 웃었다. 길어지는 간지럼에 간지러워 그냥 바닥에 적어, 말하려던 찰나 밖에서 찢어질 듯한 고함이 들려왔다.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서로를 향해 교감하던 온 신경이 바깥을 향해 바짝 곤두섰다.
“창문 쪽?”
재현이 바닥에 내려 뒀던 총을 급히 집었다. 익숙한 듯, 사격 준비 자세를 취하고 천천히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안을 가리기 위한 용도의 천조각들이 작은 진동에 따라 함께 흔들렸다. 확실히 무언가 있다. 재현은 빠르게 주연과 눈짓을 주고받으며 자세를 고쳤다. 재현의 한 발자국 뒤에 있던 주연도 벼른 칼을 집어 들었다. 셋 하면 뒤로 뛰는 거야. 재현이 입모양으로 말을 전할 때였다.
“…!”
셋을 미처 세지 못한 채 재현은 창문을 깨고 덮친 손에 몸을 붙잡혔다. 인간의 형태를 한 손은 재현의 팔뚝을 세게 쥔 채로 그르렁거렸다. 아주 느린 손짓으로 더듬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재현을 쥐었으나 천 때문에 시야가 차단되어 잡은 게 무엇인지 갈피를 못 잡는 듯했다. 밤이 되면 더디고 무디어지는 그것들의 특징임을 재현은 알았다. 주연이 본능적으로 확 고함지르려 하자 재현은 재빨리 목소리를 낮추라는 손짓을 했다. 재현이 한 손에 걸쳐진 총을 조심스럽게 떨어트렸다. 주연아. 뻐끔거리는 입모양은 자신의 이름만을 나타냈지만 세 글자 안에 숨겨진 뜻은 명확했다. 주연아, 쏴. 주연은 머뭇거렸다.
총을 건네어 받고, 자세를 잡고, 방아쇠에 손을 걸었다. 재현의 눈은 괜찮을 거라고 주연을 달랬으나 주연의 손은 이미 떨릴 데로 떨리고 있었다. 머뭇거리는 주연을 그것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마치 신호탄처럼 그 손이 재현을 잡아당겼을 때 주연은 주저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소음기를 지나 재현의 어깨를 스쳤다. 꺽, 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 밖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주연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재현은 주연의 손에 들린 총을 뺏고 재빠르게 천을 걷어 밖을 살폈다. 확인사살 후 재현은 급하게 주연의 곁에 주저앉았다. 재현은 총을 갈무리하고 계속 떠는 주연을 마주 안았다. 주연이 덕분에 내가 살았어, 괜찮아. 달래오는 목소리에 체온이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생존을 위한 삶을 산 지 꽤 지났는데, 주연의 사격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엇을 죽여서 괴롭다는 생각은 없었다. 주연은 무르지 않으니까. 다만 자신이 쏜 총알이 재현을 앗을 수 있었을 미래를 두려워할 뿐이었다. 총알이 스친 팔뚝에서는 피가 멎지 않고 바닥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으나 주연은 그저 재현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달콤한 목소리를 들으며 모든 감정을 삼켜야 했다.
*
둘은 평소에 자주 부딪혔는데 보통 도마에 오르는 주제는 답장 주기나 데이트 코스, 에어컨 온도 같은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일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보낸 이유 또한 확실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실랑이를 벌이곤 했지만 이재현은 금방 화를 삭일 줄 알았고 이주연은 태생적으로 무던했다. 싸우고 삐쳐도 최대 하루를 안 갔다는 말이다. 금방 서로의 잘못을 토로하고, 머쓱해하고, 애교를 부리고, 결국엔 입술을 찾거나 셀카를 보내는 식이었다. 연애는 대부분 무탈하게 이어졌다.
주연아
제발 형 연락 좀 받아
형이 잘못 했어
다툼은 오래가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으나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번 다툼도 역시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딱히 편식 않는 주연이 일주일 전부터 돈가스로 유명한 맛집을 찾았다며 노래를 불렀고 재현은 인자한 얼굴로 끄덕였던 것을 기억한다. 주연의 볼을 꼬집으며 재현은 캘린더 어플을 켰다. 서로 쉴 수 있는 시간을 확인한 뒤 약속을 잡았던 것까지 기억한다. 카페는 형이 알아 올게. 그런 말로 주연을 잔뜩 기대하게 했던 것도.
그리고 고대한 날이 되었을 때 재현은 그 모든 걸 까맣게 잊고 주연을 김치찌개 집에 데려갔다. 형 진짜 김치찌개예요? 이주연이 왠지 굳은 얼굴로 반문하면 이재현이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동네에서 제일 맛있다더라. 너 생각났어. 이 무슨 한 편의 꽁트였는지.
“우리 오늘 돈가스 먹기로 했는데요.”
주연의 입에서 음식 메뉴가 나오자마자 몸 속 장기가 내려앉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심장이 머리에서 뛴다는 것을 재현은 실감했다. 조수석에 앉은 주연의 허벅지 위에 꼭 잡은 두 손을 주연은 떨쳐냈다. 여기까지 진행됐을 때 재현은 허겁지겁 차를 틀어 갓길에 주차했다. 핸들을 잡으며 두 손을 싹싹 빌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흘긋 확인한 주연의 얼굴이 잔뜩 물렁했다. 무슨 햇볕에 사흘 내놓은 복숭아 마냥. 주연의 마음이 풀린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면 당장 갓길에 머리라도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재현은 눈으로 주연의 얼굴을 살피며 주문처럼 말을 어물댔다.
“주연아 형이 진짜 미안. 정말 정말 미안. 내가, 진짜 기억하고 있었는데.”
결과적으론 주연이 목 빠지게 기다리던 돈가스 맛집은 가지 못했다. 주연이 기다리던 돈가스는 모르는 동네의 일식 체인점 주방에서 만들어졌다. 주연은 고구마 치즈 돈가스, 재현은 김치 나베를 시켰다. 먹는 중간중간 재현은 주연을 살폈고 주연의 얼굴은 평소보다 조금 찌푸려졌을 뿐 평안해 보였다.
“형 잘 먹었어요.”
“괜찮았어? 나베도 괜찮던데.”
“저 집에 혼자 갈게요.”
둘 다 바닥까지 긁어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계산까지 마쳤을 때 주연이 돌연 통보했다. 그럴 만하긴 했지만, 정말 어렵네. 주연은 차로 집 앞까지 데려다 준다는 걸 끝까지 거절하고 매정하게 정류장 쪽으로 돌아섰다.
2년여의 시간이 재현에게 가르쳐준 것이 있다. 주연은 은근히 고집이 세고 이 상황에서 끝까지 데려다 준다고 우겼다간 가로수 하나가 도로에 나동그라질 수 있다는 것. 재현은 단념하고 주연이 간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럴 때 저녁까지 싹싹 빌면 반 정도는 풀어졌던 것 같은데 생각하면서. 그리고 재현은 그동안 축적한 주연 매뉴얼에 알맞게 길고 긴 사과 메시지를 날려 댔다. 주연아 형이 정말 잊으려고 한 게 아니고, 형이 말한 건 지키는 사람이고, 주연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후략).
거짓말처럼 그 후 주연에게서 온 답장은 일체 없었다. 화나도 연락은 꼬박 보기로 약속했었다. 단문이어도, 자음 한 자여도 좋으니 서로를 불안하게 하지 않기로 했었는데. 마지막으로 자신이 보낸 메시지는 하루를 훌쩍 넘긴 채였고 사과문 또한 읽지 않은 표시가 또렷했다. 재현의 마음이 말라갈 찰나였다.
“형. 저 주연이에요.”
초인종 소리가 급박하게 울리더니 급기야 밖에선 문을 쾅쾅 두드렸다. 주연이? 재현은 외모를 갈무리할 시간도 없이 현관으로 뛰쳐나갔다.
“가야 돼요.”
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피로 범벅이 된 주연이었다. 얼굴은 이미 울상이었는데 그걸 숨기려고 잔뜩 찌푸려 안쓰러울 정도였다. 안으로 들어와서, 일단. 주연아. 추우니까. 재현이 주연을 끌어당겼으나 주연은 미동도 없이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형, 가야 돼요, 안 그럼 죽으니까, 그렇게 되니까.
*
어슴푸레 날이 밝아왔다. 모든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걸 잊지 말라는 듯이 천이 꽉 묶인 재현의 팔이 주연을 감싸 안고 있었다. 며칠쯤 전인가, 계속 피가 나는 팔을 붙들고 주연은 눈물을 쏟아냈는데 그 추태가 무색하게도 피는 금방 멎은 것 같았다. 상처도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아무는 것이 보였다. 주연은 잠이 덜 깬 졸린 눈으로 재현의 팔을 더듬었다. 약간의 죄책감을 담은 손길이었다.
“깼어?”
재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주연을 불렀다. 좀 더 자자, 해는 아직 안 떴으니까. 재현이 주연을 꽉 껴안았다.
“팔 미안해요.”
“갑자기?”
“그냥… 신경 쓰여서.”
“…”
“원래 우리 규칙이잖아요. 늦더라도 사과하기.”
“이건 사과할 게 아닌데.”
재현이 딱 잘라 말했다. 재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대신 주연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등에 숫자를 적기 시작했다. 아무 옷이나 주워 껴입은 탓에 무슨 숫자인지 알아챌 수는 없었다. 주연은 재현의 품에 안긴 채 시간이 멈추길 바라며 숨을 골랐다.
“오늘 갈 데가 있어.”
“네?”
“앞쪽에 큰 마트 있지. 갔다 오려고 해.”
주연이 재현의 말을 듣자마자 허리를 껴안은 재현의 손을 뿌리치며 눈을 맞췄다.
“진심이에요?”
주연이 기겁을 하는 이유는 재현도 알고 있다. 이 동네에서 가장 그것이 많은 곳이니까. 필요한 게 있어도 돌아서 가거나 다른 곳에서 대체하거나 했던 이유가 그 마트 때문이었다. 주연은 질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재현을 쳐다봤다. 조금 원망이 담긴 눈이었다.
“형 팔 다친 거 얼마 안 됐어요.”
“열흘이나 지났어.”
“열흘 밖에.”
“필요한 게 있어.”
“다른 데서 구하면 안 돼요? 꼭 필요해요?”
“응.”
“뭐가 필요한 건데요? 나는 반대예요.”
물자를 가져오는 건 재현이 앞장섰기에 주연은 더 말려야만 했다. 하지만 대개 그렇듯 상황은 운동력을 가진 쪽에 유리하게 흘러가곤 한다. 재현은 마주 상체를 일으키며 주연과 눈을 맞췄다. 나도 사과할 게 있어.
“그래서 사과할 때 쓰고 싶어.”
“사과할 거 없어요. 이제 됐죠?”
“우리 규칙이잖아.”
재현이 주연을 잘 알고 있듯 주연 또한 마찬가지였다. 재현은 주연 더러 고집쟁이라고 종종 말하지만, 재현도 만만치 않은 고집쟁이인 것을 본인은 모를 것이다.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하는 재현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주연은 안다. 하지만 총알이 재현의 살점을 뜯어가던 그 상황이 트라우마처럼 주연을 계속 괴롭혔기 때문에 주연은 섣불리 알겠다고 대답하기 힘들었다. 싫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 테다.
“뭘 사과하는 건데요? 제가 됐다고 하면 사과할 필요 없는 거죠.”
“말하기 싫엉.”
“장난치고 싶어요?”
겨우 막아 둔 창 틈으로 아침의 햇볕이 비집고 들어왔다. 움직일 때가 되었다는 달갑지 않은 신호. 재현도 주연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함께 확인했다.
시간에 따라 패턴이 정해져 움직이는 그것들은 아침이 되면 건물 안으로 들어가 잠을 잔다. 말 그대로 아침 시간에는 건물 안으로 그것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에 재현과 주연은 빠르게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재현은 착잡한 얼굴을 한 주연을 꽉 끌어안았다. 정 불안하면 같이 가면 되잖아. 얼마 전 날 구했던 것처럼 또 구해. 걱정 마. 다치지 않을 거야. 재현이 다치지 않겠다 못 박았기 때문에 주연은 정말 그렇게 영원히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휩싸였다. 이 시점에서 주연은 재현의 말을 거역하기 어려워졌다. 재현이 말하면 항상 이루어질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주연은 재현의 손을 맞잡았다. 무언의 동의였다.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 약속해요. 다치지 않겠다고. 재현은 주섬주섬 일어나 총을 손질하며 말했다. 으으응. 마음에 차지 않는 대답이었으나 그것만으로 충분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주연은 따라 일어나 가방과 함께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
재현의 옆구리가 처참히 뜯겨져 나갔다. 순간 일어난 일이었다. 그것들을 피해 원하던 곳까지 들어간 듯했으나 금세 재현의 비명이 층 내에 왕왕 울렸다. 문 쪽에서 망을 보던 주연은 급하게 비명의 발생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못 들을 만큼의 작은 숨소리를 따라 모퉁이를 돌았을 때 보인 건 처참히 피범벅 된 재현이었다.
“형. 형, 형. 재현이 형.”
재현이 칠갑 된 손으로 주연의 뺨을 훑었다. 너무 크게 얘기하지 마. 너까지 다치잖아. 죄 너덜너덜해진 재현이 그렇게 주연을 달랬다. 주연은 이미 나사 빠진 사람처럼 흐르는 피를 손으로 받으려 하고 있었다. 재현은 그때 딱 한 가지를 후회했다. 함부로 다치지 않겠다고 이야기하지 말걸. 자신의 말이 저주처럼 주연을 괴롭게 만드는 것 같았다.
“주연아.”
세 글자에는 많은 말이 숨겨져 있었다. 주연아 가. 주연아 괜찮아. 그 외에 전해지지 못할 어떤 말들. 주연은 함부로 크게 울지도 못하며 재현을 부축하려 했다. 몸에 힘이 빠진 재현은 마치 바람을 넣지 않은 고무풍선처럼 주연의 품에서 자꾸 흩어져 나갔다. 개의치 않고 주연은 계속 재현을 업으려 했지만 상처가 짓눌린 재현이 괴로운 소리를 내자 그것 또한 금방 포기하고 주저앉았다.
“주연아. 이거.”
그렁그렁한 눈이 맞닿았다. 재현은 지금이 어떤 것을 전할 수 있는 기회라고 직감했다. 재현은 형편없이 힘이 다 빠진 손으로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이쯤 넣어뒀던 것 같은데. 절망한 얼굴로 숨을 고르는 주연의 앞에 재현이 내민 것은 피로 범벅이 된 빵 봉투였다. 그리고 생일 초와 라이터 하나.
“크리스마스인 거 몰랐지? 그때 돈가스 안 사줘서 미안.”
재현의 손이 안쓰러운 주연의 얼굴을 훑고 떨어졌다. 혼자 초 불게 만들어서 미안. 주연은 그제서야 바닥과 벽, 자신의 몸에 새겨진 숫자들의 의미를 직면할 수 있었다. 서운했던 건 이미 다 잊었는데.
크리스마스의 끝. 주연은 잠든 재현의 품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