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진 주연은 티가 많이 난다. 사랑에 빠져서 행복한 게 나쁜 건 아니었지만 재현은 그런 식으로 티를 내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들킬 확률도 높고 물어 뜯을 가십을 주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넌지시 그 말을 했을 때 이주연이 뭐라고 했더라.
알아서 해요.
뭐 그런 식의 싸가지 없는 대답이었던 것 같다. 실제의 태도도 싸가지 없었다. 맨날 헤실헤실 웃고 싫어요, 보다는 네, 를 입에 달고 사는 이주연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사춘기가 좀 늦게 왔는데 하필 부모님도 아니고 고작 4개월 많은 주제에 형 노릇 하려고 드는 게 좀 고까울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러고 1주일 후, 주연은 한 번도 어긴 적 없던 연습을 어겼다. 게다가 연락도 되지 않았다. 연습 시간이 두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연락이 됐는데 몸이 좀 좋지 않았다는 게 변명의 끝이었다. 다른 멤버들은 그냥 어물어물 넘어가는 분위기였는데 데뷔를 코 앞에 둔 재현은 그게 용납이 안 됐다.
[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 문자를 받고 주연이 좀 겁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재현은 정말로 주연이 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으로 연습실 매트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진짜 안 가? 누군가의 물음에 대답도 하기 싫어 대충 손만 휘휘 젓고.
주연은 그러고도 한 시간이 더 지나서야 나타났다. 화부터 낼 작정으로 야, 하면서 몸을 일으키던 재현은 멈칫했다. 주연은 울고 있었다.
재현은 주연이 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정말 단 한 번도. 그래서 당연히 당황스러웠다.
"..야, 너 왜 울어."
화 내려던 걸 삼켜내고 재현은 일단 티슈부터 뽑아 건넸다. 벅벅 눈가를 문지른 주연은 재현을 보자마자 또 울음이 터졌다. 달래는 것에 서툰 재현은 안절부절못하다가 그냥 주연의 등만 토닥였다.
".....뭔 일 있어?"
생각해보면 얘가 연습 빠지고 그럴 애는 아니니까 무슨 일이 있었나보다 생각하고 말 걸 괜히 연습실에서 기다리는 바람에 주연의 우는 모습까지 마주하게 된 것 같아 재현은 내내 마음이 좀 불편했다. 물어볼까, 물어보지 말까. 몇 번이고 제 안에서 싸우는 충동을 결국 못 이기고 겨우 묻자, 주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헤어졌어요."
진짜 엄청 좋아했나 보구나. 지금 그것 때문에 연습 빠진 거냐고 퍼부을 생각이었는데 막상 또 헤어졌다고 우는 주연을 보니까 마음이 별로 좋지는 않아서 재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보통 이럴 때는 이유라도 물어봐야 하는 건가. 재현은 머뭇거리다가 묻는다. 괜히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건 싫지만 또 한 편으로는 여기서 다 풀어버리는 게 아예 미련을 떨칠 수 있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우리는 안된대요."
"누가?"
"형이요."
"그랬구나.."
"....."
".....형?"
"....."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말실수를 했음을 인지했는지 입술을 꽉 깨물던 주연이 결국 시선을 떨어뜨린다.
"..네, 저 남자 만났어요."
재현은 결국 주연을 때렸다.
입술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주연을 보자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됐다. 허겁지겁 방금 제가 눈물 닦으라고 줬던 티슈를 도로 건넸다. 주연은 동요하지 않았다. 맞은 주제에 차분하다. 때린 재현만 미친 사람처럼 연습실 안을 서성일 뿐이었다.
"...또 누구 알아?"
주연이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몰라요. 재현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들키지도 말고."
"....네."
어쩌면 주연은 재현이 우는 저를 달래줬을 때부터 조금은 제 편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했을 거다. 하지만 재현은 절대적으로 아니었다. 매트 위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둔 겉옷과 가방을 집어 들었다. 먼저 연습실을 나가려다 말고 다시 들어와 주연의 앞에 선다.
"..그리고 그런 것도 하지 마."
"....네?"
"남자 좋아하는 거."
주연은 재현을 바라본다. 저보다 한참이나 어린 것만 같은 이재현을.
그런 말을 하고 3년이 지나는 동안 주연은 여전히 남자를 만났다. 그 동안 주연이 만난 남자는 재현이 아는 것만 해도 다섯 명이 넘었다. 가장 길게 만난 남자는 3개월 정도 됐고 가장 짧았던 연애는 2주가 채 안 됐다. 그런 것도 사귄 걸로 치냐는 말에 주연은 뭐가 문제냐는 얼굴을 했다.
"그래도 할 건 다 했어."
"야, 됐다."
그 날 이후 아무에게도 말하지도 들키지도 말라는 재현의 말을 주연은 충실히 이행했다. 정말로 여전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며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주연은 유일하게 아는 재현을 대나무숲 정도로 생각한다는 거다.
"이번에는 왜 헤어졌는데."
"내가 재미없대."
주연이 아이씨... 한다. 재현은 게임 오버가 뜬 주연의 휴대폰을 힐끔 보다가, 이내 낚아채 그 판을 깨준다. 주연과는 다르게 정확하고 빠르게 재현의 손가락이 액정 위를 오간다. 주연은 흥미로운 눈으로 그걸 바라봤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재미 없는지 다시 벌러덩 드러눕는다.
"난 너 웃긴데."
넥스트 스테이지, 라는 글자가 주연의 시야에 닿는다. 주연은 다시 휴대폰을 받아들자 몸을 빙그르르 돌려 엎드린다.
"그래?"
"응."
재현은 주연을 등지고 앉는다. 그리고는 방금 한 말에 대해서 후회한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런 후회 안 하겠지만 아무래도 주연은 남자를 좋아하니까.
재현은 몇 번이고 주연이 저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배제하려고 애를 써봤다. 하지만 그 동안 주연이 만난 남자들의 사진을 보면 (물론 전부 다는 아니고 몇 번 주연이 보여준 적이 있다) 주연은 무조건 얼굴을 보는 스타일 같은데, 그렇다면 이재현이라고 후보에서 제외될 건 뭐냔 말이다.
"내 말 듣고 있어?"
망상에서 벗어난 재현이 퍼뜩 어깨를 떨며 주연을 돌아본다.
"미안. 뭐라 했어?"
"또 죽었어. 이 판 깨 달라고."
재현이 익숙하게 휴대폰을 받아든다.
"그럼 크리스마스에 데이트 안 하겠네."
별 거 아닌 것처럼 들리게 하고 싶어 얼마나 안간힘을 쓰는지 이주연은 알까. 어깨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아 재현의 손에 쥐어진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주연이 그렇겠지? 했다. 주연은 거의 척추를 접어 앉아 있어 주연의 뺨이 재현의 어깨 근처에 닿았다. 헛손질을 하는 바람에 죽었다.
"형도 이 판 못 하네. 선우한테 깨달라 해야지."
가볍게 휴대폰을 쥔 주연이 방을 나가고 재현은 그제야 제가 주연이 어깨에 가까이 붙는 그 순간부터 숨을 못 쉬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
감기인가. 재현은 열이 올라 뜨거워진 이마를 손 등으로 누르며 생각한다.
주연
나 연습 ㄱ 오전 11:20
전화 ㄴㄴ 오전 11:20
잠을 한숨도 못 잤다. 카페인을 탓하기에는 요즘 커피를 안 마신 지 꽤 됐다. 다만 재현은 자꾸만 꿈속에서 그날의 주연과 제가 보였다. 남자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어린 주연과 그런 주연을 엉성한 주먹질로 때리던 마찬가지로 어린 재현.
왜 자꾸 그때의 꿈을 꾸는 지 모르겠다. 눈을 뜨자마자 본 메시지가 단톡방에 올라온 주연의 메시지라 또 괜히 찔렸다. 실제로 약간 어색한 사이였다가 친해진 그 이후로도 그날의 이야기는 한 번도 입에 올려본 적이 없다. 주연은 며칠 내내 입술이 터진 채로 다녔는데 누가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했다. 재현은 누군가가 주연에게 그 상처에 대해 물을 때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려웠다.
주연은 연습실에 있긴 했지만 연습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귀가 터질 것처럼 세게 틀어진 음악을 끄자, 연습실이 확 고요해졌다. 매트 위에서 뒹굴뒹굴하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주연이 고개를 틀어 입구 쪽의 재현을 바라본다.
"아, 왜 꺼."
"귀 먹었냐? 노래를 왜 이렇게 크게 틀어."
그러면서 재현은 터덜터덜 주연의 옆으로 와 앉는다.
"집에 안 갔어?"
주연이 묻는다. 주연의 가족들은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함께 여행을 갔다고 들었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에 당장 스케줄이 있는 주연은 당연히 합류할 수 없어 그냥 아예 집에도 안 간다고 했었는데.
"안 갔으니까 여깄지."
"집돌이가 왜."
내가 무슨 집돌이냐며 장난스럽게 팔꿈치로 밀자 주연이 웃는다.
"형 잘 자더라."
"내 방 들어왔어?"
"응."
"왜?"
"이어폰 훔치려고."
주연이 주머니에 대충 돌돌 말아둔 이어폰을 꺼내 재현에게 건넨다. 재현이 그걸 받아 푸는 걸 물끄러미 보다가 형은 데이트 안 해? 묻는다. 손가락이 미끄러져 하마터면 이어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뭔 데이트."
"생각해보면 형 누구 만나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네. 몰래 만나는 거야?"
"....."
"불리하면 맨날 말 씹어."
그러면서 주연은 일어난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다. 어구구, 소리를 내가면서. 다시 음악을 틀 것처럼 입구 쪽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이다가 억, 소리를 내며 그대로 멈칫했다. 놀란 재현이 이어폰을 팽개치고 다가가자 괜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젓는다.
"그냥 좀 아파서."
"어디가 어떻게.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그냥 파스 붙이면 좀 괜찮아."
"연습 무리한 거 아냐?"
재현의 손이 허리 쯤에 닿자 주연이 살짝 그 손을 쳐낸다.
"....."
"....."
순식간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얼어붙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주연은 눈꼬리 끝을 축 늘어뜨린다.
"..미안."
"....."
"연습 때문 아니고 옛날 남자친구 때문에."
"....."
"자세하게 설명하기는 좀 그렇고."
"해달라고 안 했거든?"
재현이 먼저 몸을 돌렸다. 주연이 틀려고 했던 노래를 틀어줬다. 아까보다는 훨씬 작아진 볼륨으로. 미안해, 놀라서 그랬어. 주연이 다가왔고 재현은 됐어, 하며 딱딱하게 대꾸했다. 조금 전까지 앉아있던 자리에 앉아 마저 이어폰을 풀었다. 여전히 재현이 화가 났다고 생각했는지 주연은 눈치를 봤다. 할 말을 찾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길래 남자를 뭐 하러 만나?"
"....어?"
"뭐 하러 남자를 만나서 그런 고생을 하냐고."
자세하게 듣고 싶지도 않았지만 안 들어도 다 알았다. 이재현도 성인이니까 그 정도는 안다. 그래서 더 화가 나고 속상했다. 왜, 대체 뭐 때문에. 놀랐는지 굳어있던 주연의 표정이 사르르 풀린다.
"형 나 되게 걱정하는 구나."
"걱정은 뭔. 아, 이걸 왜 이렇게 엉키게 해놨어."
괜히 짜증을 내며 이어폰을 매트에 도로 팽개쳤다. 그리고 재현은 일어나서 쿵쿵거리며 연습실 문으로 향했다.
"아, 어디가."
"화장실!"
정확한 이유는 댈 수 없는데 화가 났다. 굳이 이유를 얘기하자면 그냥. 정말로 그냥.
텅 빈 숙소 안은 답지 않게 고요했다. 재현은 내내 잠에 취해서 자는 동안, 주연은 거실에서 영화를 본 모양이었다. ‘나홀로집에‘ 가 틀어진 화면을 힐끔 보고 재현은 눈을 비비며 주연의 곁에 앉았다.
"클리셰 쩔어.."
"크리스마스에는 원래 이거 봐줘야 돼."
편의점 팝콘을 품에 안은 주연은 퍽 들뜬 모양새였다. 생각해보면 주연은 크리스마스를 좋아했다. 재현에게는 정말 별것도 아닌 날인데도 주연은 며칠 전부터 설레서 들떴고, 숙소에는 둘 수 없어 제 방 책상 위에 조그만 장식용 크리스마스트리를 뒀다.
11시 58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재현도 몇 번이나 본 영화니까 주연은 아마 그보다 더 많이 봤을 영화인데도 주연은 진심으로 감동하는 얼굴이었다. 재밌어? 재현은 주연의 반대쪽에 있는 탄산수를 집어 한 모금을 마셨다.
"형, 열두 시 되면 소원 빌자."
"무슨 소원."
"이브에 비는 소원.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사람들이 소원 하도 많이 빌어서 묻히잖아. 그래서 나는 맨날 내꺼 제일 먼저 들어달라고 이브에 빌어."
"별 진짜.."
안 할 거면 말고. 그러면서 주연은 소파 팔걸이에 걸쳐진 누구의 것인지 모를 패딩을 어깨에 걸치고 베란다로 나갔다. 잠시 망설이던 재현도 따라 베란다 문을 열었다. 정말로 소원을 빌 건 아니고 그냥 담배가 피우고 싶어서.
그런데 막상 불을 붙이려다가 보니 주연은 심각한 얼굴로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있었다. 뭐 빌 건데, 라고 묻고는 싶었지만 어쩐지 지금은 말을 시키면 안 될 것 같아 재현은 입을 닫았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주연과 비슷한 모양새로 손을 모았다.
이브 뿐만이 아니고 크리스마스 소원 같은 걸 빌어본 기억이 없다. 어렸을 때에는 유치원에서 갖고 싶은 선물, 이런 걸 적어서 낸 기억이 있긴 한데 소원을 빌어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이주연의 머릿속에는 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걸까, 생각하다가 재현은 이내 소원에 집중하기로 했다.
"다 빌었어?"
정적을 깬 건 주연이었다. 안 빈 다더니, 하고 놀릴 줄 알았는데 주연은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빌었냐고 물어보면 너꺼 먼저 말해달라 해야지, 다짐했다. 하지만 주연은 묻지 않았다.
"산타 할아버지가 우리꺼 제일 먼저 들어줬음 좋겠다, 그치."
주연이 웃는다. 어두운 밤, 주연이 머리 위로 손을 휘저어야 잠깐 불이 켜지는 그 발코니에서 재현은 별안간 벼락을 맞은 것처럼 깨달았다.
아. 나는 이주연을 좋아하는 구나.
재현이 빈 소원은 솔직한 사람이 되자. 였다.
스스로도 좀 재미없다고 느낀 소원이었는데, 사실 얼른 빌어야 할 것 같아 아무 말이나 생각한 게 하필 그거였다. 저는 할 말은 하고 살아요, 가 데뷔 초의 신념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재현은 하고 싶은 말을 참았다. 근데 정말로 산타가 이브에 재현의 소원을 들어주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재현은 솔직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 충동을 이겨내는 건 실로 담배를 끊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주연과 눈만 마주쳐도 말할 것 같았다. 알고 보니까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근데 그렇게 생각하니까 주연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주먹을 휘두른 제 과거 역시도 함께 떠올라 버렸다.
연습실로 와
할 말 있어
대뜸 메시지를 보내 놓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답지 않게 주연이 빠르게 확인하는 바람에 도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무슨 일 있어? 하고 곧장 답이 왔지만 재현은 휴대폰 화면의 밝기를 죽였다.
주연이 연습실에 나타난 건 30분 쯤 지난 후였다. 운동을 하고 있었는지 목에는 수건을 건 채였다.
"형 집에 간 줄 알았는데 내내 어딨었어?"
"나 한 대 쳐."
"내가 형을 왜 쳐?"
그냥 한 대 맞고 깔끔하게 그때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만 있다면, 한 대가 아니라 두 대도 맞을 수 있었다. 재현은 어느 순간부터 좀 많이 이상했던 제 행동에 대한 답이 결론지어졌다. 애도 아니고 택시 타면 코앞인 거리에서 술을 마시느라 늦게 들어오는 주연에게 짜증이 났던 것도, 남자친구 얘기 하나도 안 궁금하다고 해 놓고 막상 말 안 해주면 뭘 숨기냐고 화를 냈던 것도. 이게 다 이주연을 좋아해서 그런 거였다.
"이브 소원 뭐 빌었냐면 솔직하게 해달라고 빌었어."
"....."
"그래서 솔직 하려는 거야, 지금."
"..나한테 맞고 싶은 게 솔직한 거야?"
겠냐, 주연아. 재현은 한숨을 푹 내쉰다. 맨날 저한테는 남자 눈빛만 봐도 저를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안다 어쩐다 하더니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샜던 게 분명하다.
"...좋아해."
"....."
"남자친구... 시켜줘."
멋없는 고백이었을지 모르지만 분명한 건 재현은 소원대로 솔직했다는 거다.
"추운데 꼭 여기서 먹어야 돼?"
"응."
베란다 유리문에 등을 기대고 둘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지도 모른다고 뉴스에서는 연신 떠들어댔지만 결국 눈은 안 오고 춥기만 했다. 재현은 옷소매를 늘여서 쭈쭈바를 쥔 주연을 힐끔 보다가 제 손으로 힘껏 녹여 쥐여 준다.
"남자친구 생기니까 좋네."
"그만 놀려라."
"놀리는 거 아니거든."
"근데 너는 뭐 빌었어? 소원."
"음..."
주연은 잠시 고민한다. 재현이 주연에 대해서 잘 아는 바, 이럴 때는 관심 있는 걸 티내면서 보채면 안 된다. 오히려 관심 없는 척 해야 혼자 입이 근질거려서 말해주지. 재현이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서 돼지 바를 다섯 입 만에 아작 낼 동안이나 생각하던 주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놀리면 안 돼."
"안 놀려."
"남자친구랑 크리스마스에 커플링 끼고 첫 키스하게 해달라고 했어."
"첫 키스? 너 키스 안 해봤어? 잘됐다, 나돈데."
"....."
"....왜?"
"...나는 2022년 첫 키스 말하는 건데.."
"....2022년?"
"....하반기.."
"....."
"아니, 사실은 12월 첫 키스.."
장난하나, 진짜. 재현이 일어나려는데 주연이 먼저 재현의 팔을 잡아 도로 주저앉힌다. 가까워지는 얼굴. 재현에게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운 장면. 주연의 속눈썹이 사르르 감겨 주연의 온 우주를 가리는 그 순간을 마지막으로 재현의 세상도 까맣게 변했다.
"....."
"....."
산타 할아버지, 소원 한 번 끝내주게 이뤄주시는 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