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Friend, Fake Santa

김심
이혼을 하고 가장 달라진 게 있다면 아침이다. 와이프가 깨워주면 눈을 뜨고, 제 몫의 밥을 먹고, 씻고, 옷을 입으면 됐던 아침이 두 배로 바빠졌다. 평소 일어나던 시간보다 30분이나 빨리 맞춰둔 알람을 끄자마자 벌떡 일어나 은호를 깨워야 하고, 잠투정을 하는 아이를 세수 시키고, 옷 입히고, 밥을 먹이는 것도 재현의 몫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혼자만의 몫이었다.

부인이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은호가 세 살 때의 일이었다. 꽤 오래 지속된 관계였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게 재현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 가정을 지킬 생각이 없다고 했다. 재현 역시도 가정에는 별다른 미련이 없었다. 맘에 걸리는 게 있었다면 오직 은호뿐이었다.

"아빠."
"응."
"일요일에 크리스마스인 거 알지?"
"유치원 차 오기 10분 전인 거, 은호도 알지?"

재현은 칫솔을 문 채로 은호의 머리 위로 맨투맨을 씌웠다. 냠냠. 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은호가 입에 내내 물고만 있던 볶음밥을 억지로 씹는다.

"작년처럼 아빠가 산타 분장하고 그러는 거 하지 마."
"....."
"나 이제 다섯 살이야. 알 거 다 알아."

재현은 대꾸 없이 손을 뻗어 은호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매년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가장 먼저 하는 게 있다면 내년의 크리스마스가 몇 요일인지 확인하는 거다. 하필 이번에는 크리스마스가 일요일이라 유치원 선생님들한테 은근슬쩍 맡기는 짓도 할 수가 없다. 작년에는 은호가 크리스마스 3일 전부터 심한 독감에 걸려 유치원을 가지 못해 결국 재현이 당근 마켓에서 싸게 구매한 산타 복장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냥 좀 속아주면 안 돼?"
"치... 나 올해 안 울었으니까 산타 할아버지가 진짜 올 수도 있잖아."

작년의 은호는 밥을 먹다 말고 울고, 옷을 입다 말고 울고, 유튜브를 보다 말고 울었다. 엄마가 보고 싶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한들 재현이 해줄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은호는 언젠가부터 엄마가 몇 밤 자면 오냐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재현은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산타 할아버지 핀란드에 살아. 한국 오려면 너무 멀어."
"치.."
"자, 그만. 이제 일어나, 차오겠다."

조그만 신발에 발을 넣으면서도 은호는 내내 뾰로통한 얼굴이었다. 결국 재현은 앙증맞은 그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은호가 정 그렇게 산타 할아버지 보고 싶으면 아빠가 핀란드에 국제 전화 할게. 은호 보러 오라고."
"진짜?"
"응."
"아빠 최고."

제 목에 달랑달랑 매달린 여린 숨결을 느끼며 재현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좆됐다.





은호는 유치원에서 몇 명 없는 나머지 반 아이였다. 나머지 반은 데리러 올 보호자가 없어 7시까지 유치원에 있어야 하는 아이들이 속해 있는 반인데, 이혼을 하기 전에는 주부였던 와이프가 있어 나머지 반에 있을 필요가 없었던 은호는 재현이 이혼을 하자마자 그 반으로 옮겼다.

이혼남이라는 타이틀이 도움이 되는 건, 5살짜리 남자애를 홀로 키우는 아빠라는 이유로 회식에서 무한 제외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특별대우가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은호가 지금 겨울 왕국을 보고 있어서요. 15분이면 끝나는데 잠깐 기다리시겠어요?"
"네. 그럴게요."

재현은 공손하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는 선생님에게 마주 인사하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유치원 마당을 서성거린다. 은호가 자주 얘기했던 공룡 모양의 미끄럼틀, 색이 조금 바랜 그네,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하고 그대로 둔 듯한 모래 위의 모형 음식 같은 것들을 눈에 담는다.

그러느라고 등 뒤에 있는 낮은 울타리가 열리는 것도 몰랐다. 들리는 발소리에 뒤를 힐끔 돌아본 재현이 움찔한다.

"....."

깡패인가?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거였다. 그러다가 깡패가 유치원에 올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걸 깨달은 직후에는 이 유치원에 교사로 일하고 있는 20대에서 30대 여 선생님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남자친구가 꽤 무섭게 생기셨네, 그러면서. 그러다가 유치원 유리문이 열리며 은호의 등 뒤로 따라 나오던 여자아이가 그 남자에게 달려가 안기는 걸 보고서야 보호자구나, 했다.

왁스를 발라 깔끔하게 넘긴 새까만 머리카락과 먼지 하나만 붙어도 티가 팍팍 날 것 같은 새까만 정장에 새까만 구두를 신은 남자는 키가 크고 훤칠한 미남이었다. 루리야! 남자가 무릎을 접고는, 제게 달려오는 여자아이를 번쩍 안아 올린다. 루리. 라면 재현도 알았다. 은호가 입이 닳도록 언급한 애라서 그랬다.

애 이름이 루리가 뭐야, 미국 애야? 그러자 은호는 재현에게 눈을 흘겼다. 아빠는 멋을 몰라, 그러면서.

그 루리 아빠구나. 아빠의 외관을 보아하니 애 이름 그렇게 짓는 것도 조금은 이해가 갔다. 부녀의 눈물겨운 상봉을 뒤로하고 재현과 은호는 떨떠름하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아침에 봤는데 또 보니까 저 정도로 반갑지는 않다는 뉘앙스를 팍팍 풍기면서.

"아들. 오늘 유치원에서 뭐 했어."
"뭐 했긴. 맨날 하던 거 했지."
"저녁 뭐 먹을까."
"시켜 먹자. 나 맛있는 거 먹고 싶어."
"아빠 요리 맛없어?"
"엄청 맛있지는 않지."

쪼끄만 게 진짜. 재현은 괜히 서운해서 입을 삐죽거리다가, 허리를 접어 은호를 번쩍 안아 든다. 은호가 재현의 목을 한 팔로 껴안으며 나도 다리 있어, 했다. 알아, 인마.

"선생님께 인사."
"안녕히 계세요."
"은호도 메리 크리스마스!"

저 분들은 크리스마스 일요일이라 좋겠다. 재현은 선생님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은호야, 잘 가."

루리가 먼저 은호에게 인사를 했다. 은호는 받는 둥 마는 둥 손만 흔들다가 재현의 어깨로 얼굴을 폭 묻어버린다. 쟤 좋아하는 구나. 어쩐지 같은 반 애들 다 시시하고 유치해서 유치원 졸업 하자마자 연락 다 끊을 거라던 애가 맨날 루리 얘기는 한다 싶었는데.

허공에서 눈이 마주친 루리 아빠에게도 머쓱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막 나가려는데 등 뒤에서 루리 아빠가 재현을 부른다.

"재현이 형."

은호 아버님, 도 아니고 재현이 형이라고.






"감사합니다."

고양이처럼 눈이 큰 루리는 양손으로 공손하게 물을 받아든다. 주스 좀 사놓지. 소파에 나란히 앉은 은호가 눈을 흘겼다. 아저씨가 주스 사 올까? 묻자 등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루리 그런 거 잘 안 먹어서."
"괜찮아요.."

한 박자 늦게 얘기한 루리가 정말 괜찮다는 듯 벌컥벌컥 물을 마신다.

겨울왕국 2를 틀어주고, 영화에 금세 집중한 아이들을 뒤로한 채 재현은 식탁 의자를 빼 앉았다. 루리와 비슷한 모양새로 컵을 쥔 주연이 힐끔 재현을 바라본다.

"이게 얼마 만이냐, 진짜."

라고 물었지만 얼마 만인지 재현은 안다. 꼬박 12년 만이다. 강산이 변하고도 2년이 더 흐를 만큼의 오래된 시간.

"그러게요.."

주연이 말끝을 흐린다. 재현은 저도 모르게 주연을 아래위로 훑는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니길래 이런 복장을 하는 걸까, 싶었다. 재현이 가끔 마주치는 나머지 반 아이들의 아버지들은 대체로 배가 나온 모양새로, 슬리퍼를 직직 끌고 와서 아이를 데려가곤 하는데.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어요."

재현은 주연의 시선을 피한다. 그러게. 그러면서 언제 흘렸을지 모를 식탁 위 빨간 국물을 노려본다. 그게 무슨 죄라도 되는 것처럼.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우리 집 가서 차 한잔할래, 라는 인사치레를 거절도 안 하고 네 하고 따라오는 건 스무 살의 이주연이나 서른 두 살의 이주연이나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뭐 하자 하면 싫다고도 좀 해라. 그럴 때 이주연은 뭐라고 했더라.

"..형 그대로네요.."
"..너는.."
"....."
"너는 왜 이렇게 달라졌냐. 못 알아봤어."

잠시 의문스러운 얼굴을 하던 주연이 아... 하면서 물 컵을 내려놓는다.

"저 댄서에요. 오늘 공연이 있어서 이러고 온 거라... 평소에는 이러고 안 다녀요."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진짜로 깡패 혹은 일수꾼, 물론 두 개가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런 거라도 하는 애가 됐으면 어쩌나 싶었으니까. 재현은 함께 대학을 다니던 시절 집이 너무 어려워서 아르바이트를 세 개씩 뛰던 주연의 모습을 잠시 떠올렸다.

"결혼했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뭐 하고 지냈어, 아예 연락도 안 되고."

어쩐지 주연과 결혼에 관련한 이야기를 하는 게 껄끄러웠다. 게다가 12년 만에 만난 대학 후배에게 이혼 얘기까지 꺼내는 건 조금 더. 재현은 말을 돌리기 위해 주연에게로 화제를 옮겼다. 주연은 물끄러미 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락... 할 수가 없었어요."
"....."
"왜냐면 형이.."
"저녁 먹고 가. 애들 배고프겠다, 뭐라도 시키자."

재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넥타이가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긴장감에 굳어있던 주연의 어깨가 축 늘어진다. 네, 감사해요. 아주 조그만 목소리. 재현은 알아서 시키겠다며 휴대폰을 들고 허둥지둥 방으로 들어왔다. 방문을 닫자마자 미끄러지듯 거기에 기대어 주저앉으며 재현은 스무 살 이주연과 스물한 살의 이재현을 떠올린다.

뭐 하자 하면 싫다고도 좀 해라.
형이랑 하는 건 다 좋아요.






"집에 연락 안 해줘도 돼?"
"네?"
"....."
"아... 네. 괜찮아요."

나머지 반에 있는 아이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모 가정이거나,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거나. 후자 쪽에 가까울 거라 생각했는데 주연의 지금 반응을 보면 전자 쪽인 모양이었다. 너나 나나, 참. 재현은 말을 꾹 삼킨다.

"루리야, 많이 먹어."
"네. 감사합니다."

예의 바르기도 하지. 루리가 피자를 내려놓고 공손하게 고개를 꾸벅 숙인다. 재현은, 주연이 손가락으로 루리의 입에 묻은 피망을 닦아 먹는 것을 바라본다. 스물한 살의 이재현이 스무 살의 이주연에게 자주 했던 행동이다. 형 더럽게 이걸 왜 먹어요. 부끄러워서 양 쪽 귀가 전부 새빨개진 주연이 더듬거리면 재현은 니가 뭐가 더럽냐? 했었는데.

자꾸 이런 걸 떠올리는 건 좋지 않다. 아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은호는 아빠 닮아서 되게 잘생겼구나."
"저는 엄마 닮았는데요."
"....."
"....."
"야, 니가 뭔 엄마를 닮아. 완전 나랑 똑같이 생겼지."

당황한 주연이 피자를 떨어뜨리고 재현은 괜히 애꿎은 은호의 곱슬머리만 마구 헝클인다.

피자를 먹고 둘이 나란히 다시 겨울 왕국을 보는 사이, 그냥 두래도 말 안 듣고 식탁을 치우던 주연이 저... 한다.

"왜. 뭐 필요해?"
"형 크리스마스에요.."
"응."
"...바쁘세요?"

이거 뭐 데이트... 신청 그런 건가. 물티슈를 식탁에 내려놓으며 재현이 헛기침을 한다. 다시 만난 건 반갑지만, 그렇다고 주연과 뭘 해볼 생각은 없었다. 일단 재현의 입장은 그랬다. 예나 지금이나 좋아하는 것 앞에서는 폭주 기관차가 되는 주연의 생각 같은 건 알 수 없었지만.

"...주연아, 그래도 우리 그러면 안 돼. 내가 바쁘면 뭐하고 한가하면 뭐할 건데."
"....형 그게 아니라.."
"....."
"루리한테 산타인 척 한 번만 해주시면 안 돼요?"

김칫국 사발로 들이마시는 것도 유분수가 있지. 재현은 숨을 헙, 하고 참는다. 아, 그거? 그러면서 괜히 민망해 물티슈로 식탁을 벅벅 닦는다.

"아, 그, 그래. 그러지 뭐. 그럼 너가 우리 은호한테 산타 하면 되겠다. 하하."
"....."
"....."
"...풉.."
"...웃냐?"
"웃기니까요.."

많이 웃어라, 그래. 재현이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으려 애를 쓰는 주연을 향해 눈을 흘긴다.





열 한 자리의 숫자는 사람을 정말 싱숭생숭하게 만든다. 피곤해 보이는 루리를 한 팔로 가볍게 안아 들고 집으로 돌아가며 현관에서 주연은 제 휴대폰을 재현에게 건넸다. 번호요. 그러더니 또 재현이 오해라도 할까 봐 그랬는지 계획 세워야 하니까, 하는 말을 덧붙였다. 그 덕에 주연의 번호도 재현에게 남았는데, 재현은 그 번호를 휴대폰 화면에 띄워 놓고 한참이나 노려봤다.

같은 유치원 다니니까 아무래도 집이 아주 멀지는 않을 텐데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다. 오늘따라 은호는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그건 아마 루리 때문일 거다. 아닌 척 하면서도 루리를 집에 데려와서 놀았던 게 썩 좋았는지 눈을 감고 곯아떨어지기 직전까지도 루리의 얘기를 했다.

나중에 또 불러도 돼?

재현은 그러라고 했다. 잠이 든 은호의 방 불을 끄고,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제 방으로 돌아와서 재현은 내내 모로 누운 채 휴대폰을 바라봤다. 생각해보면 예전에도 주연은 연락이 잘 안 되는 사람이었다.

집에 가서 전화해.

라는 말을 하면 네, 하고 대답은 해놓고 절대 전화를 하지 않는. 메시지를 보내면 두어 시간 있다가 죄송해요 형 늦게 봤어요, 하는. 그래서 재현은 12년 전 스물한 살의 이재현이 스무 살의 이주연을 훨씬 더 좋아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재현은 그전까지는 남자를 좋아하는 이재현, 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던 사람인데.

과에서 저와 인기투표 1, 2위를 다투는 잘생긴 후배가 사실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스무 살이면 아무래도 제 주량 같은 거 잘 모를 텐데 주는 족족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빼지도 않고 받아 마시던 대각선 자리 이주연이 신경 쓰였던 그날. 생긴 건 차갑게 생겼는데 어쩐지 맹하고 순하고 계속 뭘 흘리는 게 자꾸만 눈이 갔던 그날. 취해서 널브러진 다른 애들은 다 빼고 콕 집어 이주연의 길쭉한 팔만 제 어깨에 걸고 호프집을 나왔던 그날. 이주연은 잠꼬대처럼 수인의 이름을 불렀다. 수인? 여자 친구인가 생각했는데 수인은 남자였다. 그것도 재현의 동기.

수인과 주연은 잘 붙어 다녔다. 둘 다 농구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어서 그렇기도 했고, 딱히 남자들끼리 몰려다니면서 술 마시는 거 잘 안 즐기는 주연이 수인이 있는 술자리에는 빠지지 않고 출석 체크를 해서 그렇기도 했고.

"너 최수인 좋아하냐?"

주연은 책을 떨어뜨렸다. 그것도 와르르. 재현이 무릎을 꿇고 앉아 책을 줍는 내내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더니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재현은 되물었다. 왜 내가 아니라 최수인이냐고.

그냥 그게 궁금했다. 최수인은 이재현보다 키도 작고, 그렇게 잘생기지도 않았고, 다정하지도 않으며, 술에 취한 이주연을 챙겨주지도 않는다. 이재현이 보기에 최수인과 이주연은 주인과 하인 같은 사이였다.

"내가 너한테 훨씬 잘해주는데."
"....형 저 좋아하세요?"
"뭐... 그래야 되냐?"
"....."
"그래야 되면 그러고."

이재현은 아직도 모르겠다. 이주연과 헤어진 이후로는 남자에게 정말 요만큼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때의 저는 왜 그랬는지.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이주연을 좋아했었던 걸까.

이주연은 1년 쯤 지났을 때 헤어지자고 했다. 부모님을 따라 일본으로 이민을 가야 한다면서. 장거리 연애 같은 거 할 자신도 없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재현을 의심하느라 스트레스 받을 것 같다고 했다. 연락도 하면 안 돼? 공항에서 이재현은 울었다. 먼발치에서 주연을 기다리는 주연의 부모님이 이상하게 생각할 만큼 그랬다. 주연은 울고 있는 재현을 따라서 울지는 않았고, 그저 입술이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면서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사랑해요."
"....."
"이 말 한 번도 한 적 없는 것 같아서."

그게 둘의 마지막이었다. 12년 후에, 아빠와 아빠로 만나게 될 줄 재현은 몰랐다. 아마 그때의 주연도 그랬을 거다.






"이런 건 어디서 샀어?"
"루리 엄마 살아있을 때 사놨던 거요. 루리 크리스마스 챙겨주려고."
"....."
"제가 말 안 했나. 루리 엄마 사고로 죽었어요. 루리 태어난 지 8개월 됐을 때."
"..힘들었겠네."

재현이 손을 뻗어 주연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오늘의 주연은 깡패 같은 옷차림 대신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었다. 공연도 연습도 없는 날에는 주로 백수라고 했다. 루리는 오늘 할머니 집에 갔고 은호는 한 달에 한 번 엄마를 만나는 날이다. 그래서 이 집에는 이재현과 이주연 둘 뿐이다.

자취방의 이재현과 이주연은 틈만 나면 몸을 붙였다. 사방이 막혀있고, 둘은 혈기 왕성한 이십 대였다.

"저한테 맞으니까 형한테도 아마 맞을 거에요."
"....."
"..왜 그렇게 봐요?"
"아니... 이거 옷 벗고 입어야 되냐, 입고 입어도 되냐 물어보려 했어."
"당연히 입고 입어도 되죠. 형한테는 좀 더울 수도 있겠다. 형 더위 많이 타잖아요."

고작 8개월 사귀었고 10년을 넘게 남처럼 떨어져서 모른 채 살았으면서 주연은 별걸 다 기억한다. 재현은 새하얀 가짜 콧수염을 붙이고 주연을 바라본다. 주연이 손 등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여전한 습관이다. 이재현도 별걸 다 기억한다.

"어떤 사람이었어?"
"뭐가요?"
"루리 엄마."
"....."

11년 내내 주연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재현이 상상했던 주연의 모습 중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모습은 없었다. 주연은 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본인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으니까.

"일본 사람이었어요."
"....."
"저를 다 알면서 그런데도 사랑해줬고. 그래서 평생 이 사람이라면 함께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
"사실 지금도 그날 사고로 제가 죽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만큼 나쁘니까."
"...주연아. 내가 괜한 걸 물.."
"형 보는 순간에.."
"....."
"....."
"....."
"형도 혼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죄송해요."

주연이 고개를 떨궜다. 머리가 짧게 깎여 드러난 뒷 목을 순간 만지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재현은 안간힘을 써서 주먹을 쥐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뭐 할래."
"루리 엘사 좋아해요.."
"루리 말고 이주연."
"....."
"이주연은 뭐 좋아해."

물끄러미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늘 그렇듯이 한참이나 답을 하지 않던 주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저 루리 데리러 가야 해서.."
"....."
"토요일에 봐요."
"그래."





이브 날 저녁 재현은 은호를 데리고 주연의 집으로 향했다. 은호가 놀러 온다고 하니 루리가 답지 않게 떼를 써서 부랴부랴 오늘 아침에야 구매했다는 키가 작은 트리가 거실 한쪽에 반짝이고 있었다. 주연의 집은 깔끔한 편이었으나 절대로 주연이 미니멀리스트는 아닌지 잡동사니가 많았다. 은호의 장난감과는 사뭇 다른 루리의 장난감들이 거실 한쪽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연한 레몬색의 매트가 깔려 있었다. 재현이 검은색 가죽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자, 막 재현의 코트를 받아 방에 걸고 돌아온 주연이 허리를 숙여서는 은호의 옷소매를 걷어준다.

"은호야, 아빠랑 같이 손 씻고 와. 간식 먹자."
"나 손 깨끗한데."

재현의 말에, 팔꿈치까지 옷소매를 걷은 은호는 기다릴 생각이 없는지 루리를 따라 화장실로 들어갔고, 주연이 천천히 재현에게 다가온다.

"그래도 손 씻고 오지."
"귀찮은데."

그냥 괜히 장난치고 싶어서. 재현은 일부러 삐딱선을 탄다. 그걸 다 아는지 모르는지 묘한 눈으로 재현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그럼 간식 안 줘야지. 쌩하니 몸을 돌리는 주연의 등 뒤로 재현의 웃음이 터졌다.

"자, 여기다가 소원 적는 거야. 그래서 트리에 달아 놓으면 내일 산타 할아버지가 이뤄주신대."

은호와 루리는 카드를 들고 식탁에 앉았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주연이 재현에게도 카드를 건넸다.

"..뭐... 나도 적으라고?"
"산타 할아버지가 이뤄줄지 누가 알아요."

재현은 한참이나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주연은 뭔가 적을 게 있는 건지 재현을 등진 채 앉아 있었다.

넷이 적은 카드가 트리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재현은 졸린 지 연신 눈을 비비는 은호에게 패딩을 입혀주고는 번쩍 안아 올린다.

"그만 가야겠다. 루리야, 내일 보자."
"네. 아저씨. 안녕히 가세요."

양 손을 예쁘게 모은 루리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다. 내일 봐. 재현은 주연에게도 작게 얘기했다. 주연은 졸려서 재현의 어깨에 완전히 얼굴을 파묻은 은호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네, 했다. 역시 작은 목소리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재현은 아빠와 똑 닮은 루리를 떠올린다. 엄마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여러모로 주연이 많이 생각나는 얼굴이다. 조용하고 순하고 착한 성격까지도 주연을 빼닮아서. 그나저나 왜 이름을 루리로 지었는지 그거 꼭 물어보고 싶었는데, 오늘도 까먹었다 싶었다.




한 번 해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재현은 산타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은호가 잠시 엄마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으러 간 시간이라 다행이었다. 처음에는 루리가 너무 애 어른 같은 경향이 있어 혹시나 속지 않으면 어쩌지 했는데, 어쩐지 들뜬 모습도 아니고 차분하게 선물을 받아놓고 루리는 산타 분장을 한 재현이 이만 돌아가야겠다며 현관으로 향하자 총총 쫓아와서 묻는 거다.

루돌프는 지하 주차장에 주차하셨어요? 라고.

재현은 얼떨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루리는 루돌프도 궁금한 모양이었는데 다행히 주연이 잽싸게 루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감사합니다, 안녕히가세요 해야지. 하는 바람에 흐지부지 넘겼다.

주연은 재현보다는 조금 어색한 연기에 속했으나, 산타를 보자마자 은호가 방방 뛰는 걸 보면 적어도 은호를 속이는 목적은 달성한 듯했다.

어쩌다 보니 이브 날에 이어서 크리스마스 당일 저녁도 함께 하게 됐다.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이유로 아빠랑만 쓸쓸하게 크리스마스를 보냈던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었다. 재현은 오늘 온종일 기분이 많이 좋아 보이는 은호를 조금 측은하게 바라봤다. 엄마에게 갔다 오고 나서 늘 언제부터 엄마와 함께 살 수 있냐고 묻던 은호는 더 이상 그런 걸 묻지 않았다. 이제는 절대로 엄마와 아빠와 셋이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게다가 재현은, 지우지 못한 와이프의 카톡 사진이 임신 축하 파티 사진으로 바뀌어있는 걸 2주 전 알았다. 전 아내에게 이제 은호는 어떤 의미일까.

재현의 시선이 루리를 향한다. 루리는 은호가 열 마디 하면 한 마디 대꾸했는데, 그러면서도 내내 은은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주연은 살뜰하게 루리를 챙겼다. 졸린 지 계속 하품을 하던 루리가 결국 아빠... 하고 부르자 주연은 루리를 안아 올린다.

"재워야겠다. 은호도 피곤하면 잘래?"
"어, 우리는 집에 가야지."

그러면서 은호와 눈이 마주쳤다. 은호는 집에 가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잠자리에 들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졸리단 말 안 하고 버틴 이유가 집에 가기 싫어서였나보다. 그런 은호를 역시나 눈치 챈 주연이 은호에게 손을 내민다.

"아저씨랑 양치하고 잘까? 루리 방에 이불 깔아줄게."

결국 재현이 말릴 새도 없이 둘은 나란히 누워 잠이 들었다. 얼마나 졸렸는지 재현이 내복만 남도록 겉옷을 벗기는 내내 꾸벅꾸벅 졸더니, 머리를 대자마자 은호는 곯아떨어졌다. 재현은 몸을 일으키다가, 루리의 머리를 한참이나 쓰다듬어주고 있는 주연은 물끄러미 바라본다.

"..형 맥주 한잔할래요?"

자고 가라는 말이겠지. 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못생긴 체크무늬 셔츠. 주연은 대학생 때도 그런 걸 자주 입었다. 너 그 옷 되게 좋아하나 보다. 그러면 괜히 양 볼이 빨개져서는 칭찬인 줄 알고 네... 하던 스무 살의 이주연. 주연을 다시 만나자마자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사실 주연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공연 있고 그러면 루리는 어떡해?"
"부모님도 한국 들어와 계셔서 자주 맡겨요."
"루리는 우리 은호에 비하면 어른 같네."

열린 방문으로 새근새근 자는 루리의 옆얼굴이 보였다.

"형 있잖아요."

재현이 고개를 틀어 주연을 본다. 술기운에 붉어진 주연의 얼굴. 무엇보다 서른이 넘어서 다시 주연과 마주 앉아 있는 게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 순간.

"많이 보고 싶었어요."

똑딱똑딱. 유난히 시곗바늘 움직이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불이 모조리 꺼져 있고 부엌 식탁 위 작은 조명과 거실 한쪽의 트리만 반짝여 주연의 얼굴 위로 빛과 그림자가 번갈아 가며 얼룩진다.

"..주연아, 너 취했다. 자야겠다."

재현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1:1. 둘은 한 번씩 들이받는 진심을 피하는 중이다.





불만 꺼주고 나가려고 했는데 재현은 한참이나 머뭇거리며 침대 곁에 서 있었다. 루리처럼 옆으로 누운 채 잠이 든 주연에게 이불을 덮어줬다가, 너무 목까지 덮었나 싶어 도로 허리로 내렸다가, 맞다 얘 추위 많이 타지 이러면서 다시 올렸다가.

저를 괴롭히던 충동과 싸우다 재현은 도로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는 소파에 앉아 생각했다. 무슨 충동이었는지. 그러다 트리에 시선이 닿았다. 은호의 카드는 주연이 이미 사진으로 찍어 재현에게 보내줬다.

은호의 소원은 티라노 사우르스 인형을 갖는 것. 그리고 아빠랑 놀이공원에 가는 것.

은호가 기억한다면, 이혼하기 전 세 식구가 함께 놀이공원에 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게 은호가 간 마지막 놀이공원이었다. 재현은 손을 뻗어 루리의 카드를 집어 든다.

[아빠가 안 울어서 내년에는 아빠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게 해주세요]

그리고 이주연의 카드.

[형]


'루리 말고 이주연.'
'.....'
'이주연은 뭐 좋아해.'





티라노 사우르스 인형을 품에 안은 은호는 고개를 창 쪽으로 돌린 채였다. 이은호, 재밌었어? 묻자 그제야 초롱초롱한 시선이 재현에게 닿는다.

"응. 너무너무."
"다행이네."
"근데 아빠."
"응?"

빨간 불. 재현의 손가락이 가볍게 핸들을 두드린다.

"아빠는 카드에 소원 뭐 적었어?"
"아, 그거? 그냥. 은호도 아빠도 친구랑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나는 루리랑 안 싸워. 아빠나 잘해."

재현이 손을 뻗어 은호의 머리를 마구 헝클인다.

"알았어, 인마. 아빠나 잘 할게."
"아빠, 눈 온다."
"그러네."

제가 헝클여놓은 은호의 머리를 다시 예쁘게 매만져주며 재현은 앞 유리로 하나씩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바라본다. 집에 가자마자 친구한테 연락 해야겠다고도 생각한다. 지금도 여전히 눈 오는 걸 좋아하는지 물어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