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크리스마스_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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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연속으로 이어진 당직 근무는 이재현의 혼을 쏙 빼놓았다. 납처럼 무거워진 다리를 질질 끌고 집에 도착했을 땐 단내 나는 입에서 절로 칭얼거리는 소리가 샐 정도였다.

"쭈여어언, 형 왔다아아아...."

이러면 한 살 어리지만 체격이 엇비슷한 연인은 고생 많았다며, 너른 팔을 둘러오며 깊은 포옹을 해주었기에 오늘도 내심 익숙한 스킨십을 기대했건만 정작 현관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재현을 반긴 것은 살가운 연인이 아니라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조형물이었다.

아무도 없는 거실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그 조형물은 피를 뒤집어 쓴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빨간 옷을 입고 있던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진작 유전자 진화가 이루어져 지금 시대의 우주 인류에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주름이나 덥수룩한 안면의 체모가 상당한 시각적 강렬함을 선사했다. 대체 무슨 용도의 물건인지 짐작도 가지 않던 황망함 속에서 집 안에 발을 들일 생각도 못하던 재현을 뒤늦게 나타난 주연이 폭 안아주었다.

"형 왔어? 고생했네."
"어어....근데 주연아, 저거...저거 뭐야??"

성큼성큼 다가서 긴 팔로 몸을 둘러 안을 뿐만 아니라, 등 뒤에서 뻗어온 촉수가 사지를 적당히 휘감아대는 감촉이 흡족한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낯선 조형물은 불청객처럼 어색했다. 그러나 주연은 그 질문을 진작 예상한 듯 마냥 태연하기만 했다.

"아, 저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야."
"뭔…뭔타 클로스?"
"산-타-클-로-스."

부드러운 목소리가 자아낸 발음이 괴상한 생김새 만큼이나 낯설었다.

메리 크리스마스_해

"옛날엔 크리스마스라는 명절이 있었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그 명절의 마스코트 같은 거고."

우주 문화관리부 공무원 이주연의 업무에는 소실된 옛 지구의 풍습을 조사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최근 그가 속한 부서는 '크리스마스'라는 명절을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단순히 자료를 정리하는 수준을 넘어 직원들이 직접 '크리스마스'를 체험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주연은 거기에 열렬히 찬성표를 던졌고.

대략적인 내막을 파악한 재현은 여전히 거리감이 느껴지는 '산타클로스'를 흘끗 곁눈질하며 물었다. 취지는 좋다만 그래도 이건 결국….

"집에서도 일하라는 거 아니야?"
"음, 그렇긴 한데… 일단 재밌을 거 같아서 내가 해보겠다고 했지."

어차피 우리 이번 휴가때는 따로 일정도 없었잖아. 그렇게 말하며 말갛게 웃어오는 주연을 향해 재현은 마주 미소를 지었지만 뒤로는 눈물을 삼켰다. 사실 당직 도중 충동적으로 호캉스를 즐기고 싶어져서, 오로라가 아름다운 우주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호텔까지 알아보았건만…. 혼자 앞서 나간 일정은 지금와선 부푼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셈이었다. 결국 재현은 호텔 얘기는 입도 벙긋 않은 채, 이름부터 낯선 명절을 친숙하게 받아들이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시작했다.

"그럼 형은 크리스마스… 라는 거 잘 모르니까, 주연이 니가 잘 알려줘야 해. 알았지?"
"아 형, 내가 누구야. 이주연이잖아."

나만 믿으라는 자신만만한 말 뒤로 작은 웃음 소리가 흩어졌다. 역시 이게 맞는 판단이겠지. 재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에 힘을 주고 이번에는 좀 더 길게 산타클로스와 시선을 마주쳐보았다. 한 차례의 충격 이후 슬슬 익숙해지기 시작한 얼굴은 나름 인자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았다.

🎄🎄🎄

[D-Day 2]

주말은 원래 쉬는 날이었고, 그 앞에 연차 하나를 끌어다 붙였기에 내리 사흘을 쉴 수 있었다. 재현은 늦게까지 꿀잠을 자고도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거실로 나왔다가, 어제보다 더 해괴해진 광경에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쭈볏 설 정도로 놀랐다.

붉은 옷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도 이제 겨우 익숙해지려는 찰나였는데, 오늘은 그 옆에 둘의 키보다 높은 나무가 원래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처럼 한 자리를 떡하니 차지한 채였다. 그리고 그 나무 주변으론 어디에 사용하는지도 모르겠는 자질구레한 잡동사니가 즐비했고.

"엏, 일어났어?"

재현의 눈엔 정신 사나운 난장판으로밖에 비치지 않던 광경 속에서 주연은 잡동사니를 종류대로 주섬주섬 정리하는 중이었다. 남들보다 큼직한 편이었던 연인의 손에 들린 물건은 원래의 크기보다 작아 보여 그나마 어딘가 앙증맞은 느낌은 있었다.

재현은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다 단어를 골랐다.

"그것도 크리스마스… 준비물이야?"
"오, 그 단어 딱이다. 준비물."

노력한 보람이 있었다. 그게 다 뭐냐, 는 단순한 문장보다 나름 엄선한 표현을 마음에 들어한 주연은 손가락을 딱 소리나게 튕기더니 큼직하게 고개를 끄덕여댔다.

"옛날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때 이런 걸로 트리를 꾸미면서 놀았대."
"트리?"
"이 나무를 트리라고 해."
"…이걸 왜 꾸미는데? 잠깐, 그럼 저게 장식이란 말이야?"

거실에 널린 잡동사니들은 하나 같이 시시해보였다. 스스로 빛을 내뿜지도, 홀로그램을 재생하지도 못하는 물건으로 장식을 한다니. 재현은 좀 어이가 없었는데 주연은 묘하게 설렌 얼굴로, 바로 그런 점에서 고전적인 감성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현이 여전히 미덥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자 주연은 예시 영상을 보여주겠다며 자신만만해 했다.

"일단 씻고 와."
"어엉…."

시키는 대로 씻고 왔더니 주연은 이미 거실 한복판에 자료용 영상을 띄워낸 상태였다.재현은 주연과 머리를 맞댄 채 시선을 모았다. 몇 차례의 우주 폭풍으로 소실된 자료를 이곳저곳에서 긁어모아 겨우 짜집기한 영상에선 단편적인 이미지가 난무했다. 이런 쪽으로는 문외한인 재현의 눈에도 조악한 화질 사이로 시대와 배경이 조금씩 차이가 나 보이는 풍경 안에선, 정말 주연의 설명대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와 구시대의 장식물이 주렁주렁 매달린 트리가 꼭 등장하곤 했다.

그러나 정작 재현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영상의 말미에서 아직 진화하지 못했던 구인류가 긴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추던 춤이었다.

갑작스레 등장한 남자 둘은 아마 산타클로스를 흉내낸 듯 그와 비슷한 붉은 망토를 두른 채, 박자에 맞춰 몸을 덩실덩실 좌우로 흔들며 손끝을 모으거나 상대를 가리키거나 하며 짧은 춤을 추었다. 율동 내내 그들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는데,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저런 감정만큼은 바로 최근의 일처럼 생생히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한 느낌을 주었다.

"옛날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에 저런 춤도 췄던 거야?"
"저건 우리도 아직 연구 중인데, 남아있는 데이터 중 가장 상태가 좋아서 일단은 그렇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어."
"그럼 우리 저것도 하는 거지?"
"응. 근데 트리랑 주변 먼저 꾸미고."
"저거 먼저 해보고 싶은데…."
"일단은 분위기를 좀 더 내야 재밌지."

그런가. 주연의 말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하긴 자료용 영상에서도 저 '트리' 라는 것이 꼭 등장하곤 했으니. 재현은 더 이상 토달지 않고 등 뒤로 여러 개의 촉수를 뻗어 주연처럼 트리 주변에 흩어져있던 장식물을 집어들었다. 소리 나지 않는 종부터 옛날 사람들이 상상한 날개달린 아기 천사, 썰매를 끄는 사슴이나 리본 달린 선물 박스, 크기가 다양한 원색의 공까지. 다양한 종류 중 가장 신기했던 것은 솜이라는 물건이었다. 딱딱하지도 말랑하지도 않은 감촉으로 금방 포슬포슬 흩어질 것 같으면서도 잘도 형태가 유지되는 게 묘한 재미가 있었다.

그들의 키보다 커다란 트리에 장식을 걸다말고 그걸 조물거리며 딴청을 피우고 있는 재현을 향해 주연은 묻지도 않은 설명을 들려주었다.

"옛날 사람들은 그걸로 눈을 표현했대."
"눈?"
"크리스마스의 발상지인 북유럽 쪽에선 겨울이라는 계절에 눈이 내렸었나봐."

겨울, 계절. 그 단어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예전 지구에는 그런 게 있었다지. 재현은 의무교육 기간에 학습했던 정규과목의 일부를 아스라이 떠올려 보았다.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우주에는 딱히 계절이랄 것이 없었다. 이따금 폭풍만이 몰아쳐 올 뿐. 그 때는 무섭게 너울거리는 자기장 에너지가 콜로니 천장의 시각 필터도 뚫어버리고 온갖 색으로 하늘을 알록달록 물들여버리곤 했다.

차라리 그런 오색의 향연이 낫지, 모든 게 하얀색으로 덮여버리는 광경은 재현이 생각하기엔 영 기괴할 것 같았다. 어딘가에 색을 빼앗긴 것처럼 황량한 느낌만이 가득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찰나 주연은 재현처럼 솜을 둥글게 뭉친 다음, 두 개의 솜뭉치를 연달아 세로로 이어 붙였다.

"그리고 그 눈은 이렇게 뭉칠 수도 있었는데, 그러면 이런 식으로 눈사람을 만들면서 놀았대."
"눈사람?"
"응."
"팔다리도 없는데 사람이야?"

딱히 지적하려 한 건 아니었고,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이었는데 주연은 불시의 반격을 당한 것처럼 멍한 표정이 되어 눈만 깜빡거렸다. 찬희가 그랬는뎋…. 슬며시 벌어진 입에선 재현도 잘 알고 있는 지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주연과 같은 부서 동기인 최찬희의 야무진 면모는 재현도 잘 알고 있었으니 아마 '눈사람' 얘기는 사실일 터였으나, 얇은 입술 아래 무방비하게 앞니를 드러낸 채 명확한 근거를 떠올리는 연인의 표정이 귀여워 아무 말 없이 이어질 대답을 기다려보았다.

"엏, 그래도 좀 귀엽지 않아?"

그리고 비슷한 듯 다른 화제로 딴청을 피우는 모습에 결국엔 눈이 멋대로 접히며 푸하학, 하고 웃음소리가 새고 말았다. 재현의 긍정적인 반응에 자신감을 되찾은 주연도 마주 소리내어 웃었다.

"그치? 귀엽지?"
"엉, 귀엽네."

재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도 주연처럼 솜을 둥글게 뭉쳐냈다. 금방 한 쌍이 된 눈사람은 이윽고 나란히 트리 높은 곳에 걸렸다. 빛도 홀로그램도 없어 그저 시시하다고 생각했던 장식물이 그제야 남달리 오붓해보였다. 그 느낌을 망치지 않기 위해 좀 더 열심히 손과 촉수를 놀리자 커다란 나무가 화려해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이렇게 꾸며 놓으니 제법 태가 그럴듯 했다. 주연과 함께 촉수를 길게 늘어뜨리고 그들의 정수리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었던 트리 꼭대기에 마지막으로 별을 달았을 땐 답지 않게 묘한 감동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

"이제 춤 추는 게 아니고?"

트리를 장식하고도 시간이 남았다. 팔다리를 휘적댈 만반의 준비를 마쳤건만 주연은 또 다른 걸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코코아를 만들 거야."
"그건 또 뭔데?"
"크리스마스 때 주로 즐겼던 기호식품 중 하나인데….“

달콤한 맛이 특징인 음료라나. 미각도 홀로그램으로 속일 수 있기에 '요리' 라는 행위는 꽤 고급스러운 사치가 된 지금 시대의 인류로선 크게 구미가 당기진 않는 내용이었다. 재현은 그냥 물에 '코코아' 라는 홀로그램을 씌워 놓고 즐기면 안되냐고 했다가 굳이 새침한 시선을 벌었다.

"찬희는 케이크 만든대서 서로 교환하기로 했단 말이야."

동갑내기 친구보다는 더 멋진 결과믈을 내놓겠다며 팔을 걷어붙이는 동작이 자신만만했다. 그런 사정이라면 의욕적인 것도 이해가 갔다. 뭐 도와줄 건 없느냐고 물었더니 앉아서 쉬고 있으라길래 재현은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다시 거실로 시선을 옮기자 거기엔 에너지 충전을 마친 애완 로봇들이 갑자기 생긴 크리스마스 트리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쭈냥, 짝재. 이리 와봐."

고양이와 강아지를 본따 만들어진 로봇과 남은 장식물로 한참 놀고 있으려니 어느새 달콤한 향기가 후각을 자극해댔다. 슬슬 완성인가, 싶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시음해보라는 말이 없길래 결국 재현 쪽에서 다시 고개를 기웃댈 수밖에 없었다. 작업에 몰두하느라 인기척도 느끼지 못한 연인을 향해 소리 없이 다가가 가느다란 허리를 슬쩍 끌어안자 긴 몸이 파르르 떨리다 구부정하게 접혔다.

"앟, 간지러워."
"언제 끝나, 나도 그 코코아라는 거 맛 좀 보자."

쉐프니임. 그렇게 부르자 주연은 슬며시 웃었다. 재현은 따라 웃다 말고 주연이 쥐고 있던 컵 안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걸쭉한 질감의 갈색 액체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원래 저런 건가. 재현은 아는 게 없었으니 입을 다물고 있던 찰나, 주연은 그걸 잘 저어내더니 자기가 먼저 조심스럽게 맛을 보았다. 둥글게 말린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거렸다.

"맛이 어때?"

그리고 다시 마주한 주연의 얼굴은 눈썹을 아래로 씰룩거리는 바람에 꽤 묘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를 향해 던진 짧은 질문엔 대답 대신 컵이 내밀어졌다. 순간 걸쭉한 표면이 늪처럼 느껴졌던 것은 어째서였을까.

"……."
"……."

짧은 침묵 속에서 멀뚱멀뚱 시선만 마주쳤다. 딱 봐도 맛없다는 표정인데…. 재현은 이면의 뜻을 기민하게 눈치챘지만 세상엔 알면서도 모른 척 해야 하는 일도 있기 마련이었다. 매끈한 뺨에 기합을 넣고 전달 받은 컵을 기울였을 때였다.

"컥."

나름 각오를 다졌으나 혀 끝에 닿는 생경한 자극에 저도 모르게 헛기침이 튀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콜록거리자 주연은 걱정스레 얼굴을 붙여왔다.

"괜찮아?"
"어어, 이거 참…."

독특하네. 차마 맛있다는 말이 나오질 않아 에둘러 표현한 반응에 주연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당황스러워 했다. 그게 시무룩한 반응으로 이어지기 전에 재현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근데 주연아, 이건 옛날 지구 레시피니까 우리가 잘 먹을 수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니야?"
"…그런가?"
"그치. 너가 복원에 재능이 있는 거지."

개량이랑 복원은 다른 문제인거잖아. 역시 우리 주연이다. 문화관리부의 (자칭)에이스! 들고 있던 컵은 슬쩍 내려놓고, 온갖 미사여구와 함께 호들갑을 떨어대며 양 손과 더불어 모든 촉수를 끌어 모아 박수갈채를 보내자 시무룩해지려던 표정에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

거기에 이재현은 시키지도 않은 상황극으로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구)지구 코코아를 완벽히 복원하여 올해의 직원으로 선정되신 이주연 씨,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즉흥적으로 생각해 낸 문장은 발음 한 번 꼬이는 일 없이 잘도 흘러나왔다. 주연은 그제서야 길쭉한 눈을 완전히 접고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일단 이 영광은 시음을 도와준 우리 재현이 형에게 바칩니다…."

그러고도 마치 준비한 것처럼 대답을 늘어놓는 모습은 죽이 척척 맞았다. 난데없이 큰 몸을 흔들어대며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주인들을 애완 로봇들이 영문 모르겠다는 눈동자로 응시할 뿐이었다.

☕☕☕

[D-DAY 1]

만일 데이터에도 형태가 있었다면 꽤 너덜해졌을 터였다. 벌써 몇 번째 재생하는 건지, 느린 배속의 움직임을 흉내내도 팔, 다리를 박자에 맞춰 움직이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았다. 걸핏하면 촉수가 튀어나오는 것도 문제였다. 주연은 옛 '감성'을 살리기 위해 오직 팔다리만 움직여 춤을 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벌써 20번째 실패였다.

"아."

씨. 뒷말은 꽉 깨문 어금니 사이에 묻혔다. 그와 반대로 벌써 요령 있게 동작을 익혀, 함께 춤을 추는 대신 재현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주연이 슬슬 눈치를 보았다.

"형, 아니면 동작을 좀 쉽게 바꿔볼까?"
"아니, 괜찮아."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재현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미간을 좁혔다. 그는 한층 예민해진 얼굴로 입술을 씹어대다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다. 밤을 새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저 동작을 정석으로 익혀내겠다고. 그리고 주연이와 함께 멋지게 춤을 추리라.

"넌 다른 거 하고 있어. 형이 이거 꼭 마스터 한다."

그래도 걸음을 떼지 못하고 옆에서 쭈볏거리던 주연은 형을 못 믿겠느냐는 말을 듣고 나서야 도리질과 함께 물러났다. 혼자가 된 재현은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다음 눈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영상 안의 옛날 사람과 동기화가 될 기세로 관절 하나하나에 힘을 주었다.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박자를 쪼개고 단계를 나누어 같은 동작을 될 때까지 반복하며 집중하는 사이.

"얘들아. 형아 지금 뭐 하고 있어, 방해하면 안 돼…."

어느 순간엔 바깥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까지 맺힐 정도였다. 그다지 잘 사용하지 않던 관절을 움직여대려니 꽤 에너지가 들었다. 주연은 어떻게 긴 몸을 잘도 흐물거릴 수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분명히 자신과 같은 세대의 인류가 맞았으면서.

수도 없이 지분거렸던 몸에 이런 비밀이 또 숨어 있을 줄이야. 재현은 새삼 놀라며 연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유연함을 기합으로 이겨냈다. 결국 지난한 노력 끝에 실수 하나 없이 완벽하게 춤을 춰냈을 땐 머리 끝까지 짜릿함이 가득했다. 무심코 환호성을 내지르자 그제야 주연이 방문을 열고 빼꼼 머리를 들이밀었다.

"쭈연! 형 함 봐바!"

성공했냐고 물어오는 연인의 앞에서 재현은 냉큼 시연을 보였다. 팔을 큼직하게 뻗으며 골반을 흔들어야 하는 웨이브도, 크리스마스 트리를 표현한 손동작도 완벽하게 해내며 성공적으로 춤을 마무리하자 박수와 함께 큼지막한 따봉이 눈앞에 놓였다.

"와, 진짜 완벽했다."

진심 어린 칭찬에 재현은 지금까지의 피곤함도 싹 잊고 마냥 즐거워졌다. 광대가 들썩거리며 실실 웃음이 샜는데 주연도 비슷한 표정으로 마주 웃더니 손을 모았다.

"특히 이거, 트리 모양 표현하는 부분이 끝내줬어."

디테일한 칭찬은 그렇지 않아도 높았던 콧대를 더욱 치켜세우게 만들었다.

"형이 할 땐 하잖냐."

겸손 대신 마구 우쭐거리는 대답에도 주연은 타박 대신 활짝 웃었다. 그런 연인의 반응이 그저 뿌듯하기만 했다.

🎅🎅🎅

[D-day 0]

그렇게 크리스마스, 라는 걸 즐길 준비를 마쳤다. 오늘은 그걸 영상으로 남길 예정이었다. 주연은 마지막으로 그들이 함께 꾸민 트리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자신이 만든 코코아와 찬희에게 얻은 케이크의 상태를 점검하곤 녹화를 시작했다. 거기엔 재현도 참조 출연의 형태로 등장해야 했다.

"특히 가족이나 연인들이 즐겁게 지냈다는 명절이었다고 하니까."

취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재현은 평소보다 밝은 표정을 가장하곤 주연이 느린 목소리로 트리(여긴 제가 꾸몄어요! 별은 같이 달았고요~.)와 산타(수염이 참 신기해요! 그쵸, 여러분?)를 소개하는 걸 중간 중간 거들었다. 대본 반, 애드립 반의 대사를 주연은 잘도 받아주며 상황을 리드했다.

처음에는 이런 게 다 공식적인 자료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영 어색하게 뚝딱거렸던 행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러워졌다. 땀까지 뻘뻘 흘려가며 열심히 연습한 춤을 주연과 함께 출 땐 영상이고 뭐고 까맣게 잊은 채로 동작을 맞추는데 모든 신경을 쏟았다.

서로 몸을 포개거나 직접 감각을 공유한 것도 아닌데 일정한 박자에 맞춰 같은 동작을 하는 것만으로 어째서 흡족해지는 것인지. 자료용 영상에서 보았던 먼 옛날의 사람들이 지었던 표정처럼 만면에 함박웃음이 떠오르고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게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분으로 꼭 이야기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재현은 굳이 충동을 참지 않았다. 길고 탄탄한 촉수를 꺼내는 대신, 방금 전까지 열심히 움직였던 긴 팔을 그대로 뻗어 주연을 끌어안자 커다란 몸이 저항 하나 없이 순순히 겹쳐졌다. 주연아.

"메리 크리스마스 해."
"형도."

메리 크리스마스. 마주 되돌아오는 답이 살갑다. 우리의 이런 순간도 아주 먼 훗날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면 어떤 감정을 남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재현은 주연을 안고 있던 팔에 힘을 실었다. 순식간에 또 다른 트리가 생겨난 것처럼 길쭉한 그림자는 거실 위로 길게 늘어지며 한동안, 그저 한동안을 가만히 일렁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