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을 시킬까 고민하다 매니저 형에게 부탁해 차를 세웠다. 직접 사는 게 조금 더 성의 있어 보일 것 같다는 구차한 변명과 함께. 그것도 모자라 그 옆에 있는 약국에서 감기약을 종류별로 쓸어 담았다. 묵직한 비닐봉지의 무게감에 그제야 조금 오버를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차 싶었다. 건물 입구에서 발을 세게 구르며 운동화에 묻어있던 눈을 털어낸 재현이 세팅된 앞머리를 뻑뻑 문질렀다. 센서등이 켜졌다 꺼지기를 몇 번, 길쭉한 손이 도어록 덮개를 거칠게 열어 재낀다.
고민이 무색하게 집안은 기척 없이 고요했다. 비닐봉지와 핸드폰을 아일랜드 식탁 위에 올려둔 재현의 시선이 자연스레 베란다로 향한다. 굵은 눈송이들을 올려다보고 있는 마른 등이 유난히 시려 보였다. 적요함 속에서 혀 차는 소리가 유독 크다. 유리창을 주먹으로 두어 번 두드리자 기다란 눈이 뒤를 돌아 본다. 추 워. 입 모양을 크게 해 보이자 어깨를 떨며 호다닥 안으로 들어온다.
”살만한가 봐.”
주연은 대꾸도 없이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담요 아래로 맨살을 숨긴다. 금세 빨개진 동그란 코끝을 보며 차오르는 말을 삼켰다.
”얌전히 집으로 가지 여길 왜 오냐.”
담요를 살짝 내려 눈만 내놓은 주연의 표정이 서늘하게 식어있었다. …죽부터 먹어. 꼬리를 내리고 그리 덧붙이자 몸을 동그랗게 만다. 거대한 덩어리에서 무언의 고집이 느껴졌다. 한숨을 작게 내쉬고는 담요 안쪽으로 손을 넣어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데 재현의 몸이 일순간 바깥으로 밀려난다. 무게를 실어 기대고 있던 몸을 무릎으로 밀어낸 주연의 시선이 허공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말간 얼굴에 옅게 번진 기색을 기민하게 살피는 얼굴이 순식간에 예민해졌다. 담요를 휙 걷어낸 재현이 주연의 다리를 빤히 내려다본다. 춥다는 항변은 좁혀진 미간 앞에서 힘을 잃었다.
“부었네.”
”금방 가라앉을 텐데. 한두 번인가.”
재현이 꾹 누르자 주연의 입이 작게 벌어진다. 아 쫌. 형이 누르지만 않으면 괜찮거든. 진실로 그러했다. 컴백을 앞두고 몸 상태에 관해 허세 부릴 생각은 없었다. 착지하는 과정에서 발을 헛디뎌 발목에 무리가 간 건 맞았으나 연습을 하다 보면 으레 있는 일이다. 멤버들 없이 혼자 준비하는 앨범인 만큼 힘이 들어간 건 사실이지만 당장 서바이벌을 나갔을 때만 떠올려도 이보다 더한 부상이 빈번했으니 유난 떨 일 역시 아니다. 재현의 무게가 종아리를 짓누르지만 않았다면 자연스레 넘어갈 일이었다.
”무슨 죽 사 왔는데?”
재현이 눈만 치켜떴다. 주름진 이마와 좁혀진 미간만 봐도 그의 기분이 저조하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그런 표정만으로 위축되기엔 그다지 재현이 어렵지 않은 존재라서. 주연이 입술을 오므렸다 피며 재현의 손을 툭 쳐낸다.
”내일 매니저 형한테 얘기해서 병원 다녀와.”
”파스 뿌리면 돼. 그 정도 아니야.”
”내일 단체 연습도 있잖아.”
듣기 싫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너 지금 여기 온 거 후회하지. 찝찝한 표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자 아닌데? 삑사리를 낸다. 그러고는 더 말 섞고 싶지 않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털레털레 식탁으로 가더니 비닐봉지를 막 뒤적인다. 아주 그 안으로 들어가겠네.
“그 담요가 좋아.”
”뭐?”
”내가 샀잖아.”
재현이 다리를 잘게 떨다 실소를 내뱉었다. 아픈 몸 이끌고 남의 집 차지하고 와있는 변명이라는 게 고작 이 체크무늬 담요라니. 여전히 주연은 좀…, 미지의 영역이었다. 눈을 끔벅이던 재현은 시선을 돌려 내리는 눈을 바라봤다. 바람에 무섭게 흩날리던 눈송이들이 어느덧 우주를 표랑하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CHRISTMAS JINX
“형도 뭐 마실래?”
주연이 한쪽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고는 되묻는다. 우리 지금 커피 시킬 건데. 학년의 말에 주연이 이어폰을 다시 꽂아 넣으며 고개를 저었다. 발목 보호대를 찬 채로 연습실을 가로질러 의자에 앉는 주연의 걸음걸이를 멀거니 보던 재현이 아메리카노 수량 하나를 추가하고서는 결제를 마친다.
숙소 생활을 정리하고 독립한 뒤로 모이는 시간이 더욱 제각각이다. 몸을 풀겠다는 명분으로 이어져온 내기의 고정 멤버들은 평소대로 연습실에 일찍 도착했으나 오늘만큼은 재현이 쏘는 걸로 정리된 참이었다. 붕 뜬 시간이 애매해 학년과 선우가 공을 다시 튀기기 시작했다. 그냥 한 판 하자. 주연이 형도 낄래? 액정에서 시선을 떨어뜨리지 않던 주연이 작게 탄식을 내뱉고는 고개를 흔든다. 볼을 부풀리는 건조한 얼굴에서 피곤이 엿보였다.
”너 병원 가봤어?”
”어. 그냥…, 당분간 조심하래.”
코가 막힌 맹맹한 목소리로 대답한 주연이 턱하고 핸드폰을 내민다. 뭘 그렇게 열중해서 하나 했더니 재현과 함께 시작했던 모바일 게임이다. 레벨 7에서 막혀 트라이 어게인이 뜬 화면을 본 재현이 한 템포 느리게 웃고는 바닥에 털썩 앉아 손가락을 움직인다.
조금만 더 버티면 끝이었는데. 상단에 뜬 메시지에 정신이 팔려 속수무책으로 공격당해 맥없이 죽어버렸다. 물론 다시 도전하면 되는 일이었으나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재현으로서는 도저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도 못 하겠다. 주연의 무릎 위에 핸드폰을 둔 재현이 커피를 받아 오겠다며 연습실 밖으로 향했다.
주연은 제 앞으로 내밀어지는 아메리카노를 군소리 없이 받아 들었다. 그러나 그뿐, 주연은 커피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처럼 손도 데지 않았다. 카페인 중독환자 주제에. 명백한 무시이자 무언의 시위라고 이해한 재현의 눈썹 앞머리에 성질머리가 붙기 시작했다. 연습이 다 끝나고 확인한 종이컵은 역시나 묵직했다. 반항기인가. 송곳니에 짓눌린 아랫입술이 새하얗게 질린다.
땀에 젖은 얼굴을 대충 닦아내며 모자를 고쳐 쓴 재현이 짭 소리 나게 입맛을 다시고는 엎어져있던 핸드폰을 들어 배경화면을 확인한다. 핸드폰 케이스 색이 비슷한 주연과 몇 번 핸드폰이 뒤바뀐 뒤부터 생긴 습관이었다. 케이스를 바꾸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으나 어쩐지 둘 다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조금 귀찮다고 느껴서 되는 대로 둔 지 오래다. 역시나 농구선수가 한가운데에 있는 사진 위로 메시지들이 쌓여 있는 게 보였다. 그걸 뚫어져라 본다고 잠금이 저절로 열려 내용이 보이는 것도 아니건만 재현은 한참이나 액정을 노려보다 어두워진 화면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나서야 관둔다.
”형 선물 샀어?”
헉. 연습실에 홀로 남아있던 재현이 급히 숨을 들이마시고는 날짜를 확인한다. 크리스마스에 맞춰 올라갈 영상으로 쓸 데 없는 선물을 주고받기로 한 걸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생일이나 마니또 같은 이벤트도 아니고, 그냥 적당히 웃기고 불필요한 물건을 사면 되는 거라 부담은 없었지만 자꾸만 사소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어쩐지 심란해졌다.
“나 지금 사러 갈 건데 같이 가실?”
”인터넷으로 시키면 금방 오지 않나?”
”그럼 그러든가.”
미련 없이 후드를 휙 뒤집어쓰고서 나가려는 선우를 급히 잡아채자 불퉁한 시선이 쏟아진다. 아 뭔데. 이거 서로 알고 있으면 재미없으려나? 너 나야? 아니죠. 나도 너 아니야, 그럼 그냥 가.
“어디로 갈 건데?”
”아트박스 같은 데로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면 다이소?”
형은 뭐 계획 있어요? 그냥 너 따라갈 건데. 혹시나 싶어 방문마다 열어젖히며 물어본 결과 그거 굳이 살 필요 있냐며 비웃던 학년과 행방을 알 수 없는 주연을 제외하면 이미 다 준비했다는 답변뿐이라. 다들 부지런하네…. 왠지 모르게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으로 건물 로비까지 내려온 지각생들에게는 여전히 특별할 것 없는 계획뿐이었다. 괜히 택시는 언제 도착하는 거냐며 선우를 들볶았다가 신경질만 된통 받았다.
마감 시간 직전의 3층짜리 아트박스 건물은 한산했다. 돌아다니기엔 수월했으나 물건을 정리하는 직원들 틈에서 빨리 고르고 나가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져 재현은 크리스마스 향기가 물씬 풍기는 파티 용품들을 열심히 뒤적였다. 그중 제일 눈에 띄는 하나를 집어 든 재현이 버튼을 꾹 누르자 트리 모양의 모자가 자기 멋대로 꿈틀거리며 춤을 춘다. 형 그거 써봐. 재현이 고른 것과 다른 종류인 빨간색 산타 모자가 재현의 머리 위에서 요란하게 펄떡이는 꼴을 sns에 올리겠다며 동영상으로 찍는 선우는 즐거워 보였다.
“니 뭐 샀는데.”
”나중에 봐.”
택시비는 자신이 냈으니 커피를 사라고 성화를 부리는 선우를 끌고 결국 메가커피로 향했다. 스벅 만큼 뜯어먹어주겠다고 구시렁거리며 한참 동안이나 메뉴판을 노려보더니 대뜸 묻는다.
“주연이 형은 샀대? 요즘 그 형도 바쁘잖아.”
“어? 글쎄?”
”싸웠어?”
입이 딱 다물린 표정이 대번에 불편해진다. 전화라도 해볼 걸 그랬나, 뒤늦게 작은 후회가 들이친다. 그러나 묵직하게 남아있던 커피나 저에게는 말 한마디 없었으면서 25일 약속을 잡고 있는 듯한 메시지를 생각하면 괘씸함만 들이친다.
“아 맞다. 일본 잘 다녀왔대? 방송 언제래?”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선우의 얼굴이 금방 샐쭉해졌다. 한발 물러나 눈동자를 굴리는 폼이 상황 파악에 힘쓰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람 실컷 찔러 놓고 김선우는 모르는 척, 제가 사준 음료만 쭙쭙 잘도 빨아 마셨다. 재현은 빨대로 음료를 퍽퍽 거칠게 휘저으며 들끓는 속을 애써 달랬다.
”형은 꼭 크리스마스만 되면 죽상이더라.”
입 다물고 있기로 한 거 아니었나….
제가 제일 좋아하는 명절이에요,라며 조용히 들뜨는 이주연처럼 크리스마스를 유별나게 여긴 적은 없으나 그렇다고 그게 결코 우중충하게 보내고 싶다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있지도 않은 약속을 만들어내 하릴없이 북적이는 사람들 틈을 돌아다니고 싶지도 않았고, 잘 모르는 사람과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영 성미에 맞지 않아서 재현은 이맘때만 되면 그저 숙소에 처박히기를 택했다. 소개받을래? 지나가는 말로 묻던 주변인들도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재현을 내버려 두었다.
겨울잠 자는 곰처럼 숙소 침대에 누워 취향에도 맞지 않는 영화를 흐린 눈으로 보는 재현은 사실 이 울적한 크리스마스의 시작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매년 그날, 그 시간을 곱씹으며 하루를 보냈으므로.
그러니까 그게 언제냐면, 몇 년을 거슬러 올라가 연말에 낼 싱글 앨범을 한창 준비할 때였는데….
그때쯤 재현에게 주연은 친해져야 하는 동생이었지, 마냥 편한 동생은 아니었다. 시간에 비례해 가까워질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다소 느리게 깨달았다. 친해진 것 같다고 생각할 즘 주연이 선을 긋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어색하다고 느낄 때면 다가오는 장난이 막역했다. 신호체계가 달라 오해가 쌓이는 개와 고양이처럼 재현의 호의를 주연이 받아들이지 못할 때마다 관계가 서늘하게 식었다. 주연이랑 친해?라는 물음을 받을 때 쉽게 나오지 않는 대답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런 불편함을 달고서도 유독 단둘이 소화해야 할 스케줄이 많아 재현은 관계의 표면 위를 걷는 법을 생애 처음으로 배웠다.
형, 저 형 좋아했어요.
어?
그랬다구요. 정리 중이에요.
그날도 단둘이 스케줄을 끝내고 회사 근처 고깃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을 때였다. 그러니까 깊이를 모르고 수면 위만 통통 튀기던 관계가 아래로 꼬로록 잠겨버린 날.
나를? 왜?
그냥…, 형이 제일 잘생겨 보이더라고요.
혹시 취했나? 재현은 제일 먼저 주연의 얼굴부터 살폈으나 별다를 것 없이 말갛고 뚱실한 표정이었다. 올 크리스마스 형 덕분에 외롭지 않을 것 같아요,라고 카메라에 대고 얘기하던 주연의 말이 뇌리를 스쳐 기분이 미묘해졌다. 그러나 마치 ‘잘 먹겠습니다’를 말할 때와 같이 여상한 표정이라 잘못 이해한 거라 멋대로 치부한 재현은 눈앞에 있던 된장찌개를 크게 떠먹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물론 덧붙여진 주연의 말에 당황해 뜨끈한 두부로 입천장을 제대로 지져버렸지만. 얘 여자친구 있지 않았나? 분명 스케줄 없을 때마다 나갔던 거 같은데…. 의문이 들었지만 진짜로 물었다가는 이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 입천장이 아프다고 괜히 호들갑 떨며 엄살을 부렸다. 주연은 그런 재현의 앞에 냉수를 슥 밀어주었다. 그게 또 낯간지러워서 한입에 털어 넣은 재현이 숱이 많은 눈썹 앞머리를 손끝으로 긁적이다가 아 그러냐…, 겨우겨우 한 마디 했다.
주연에게 그날의 짤막한 대화는 정리의 마침표일 수도 있었겠으나 재현에게는 빌어먹을 크리스마스 징크스의 도화선이었다.
걱정과 달리 주연과의 관계는 때 되면 찾아오는 계절처럼 일정한 속도를 유지했다. 다만, 재현이 문제였다. 억지로 붙지 않는 이상 제 곁으로는 절대 오지 않는다거나, 같이 먹을 수 있는 밥도 혼자 먹으려고 한다거나, 어물쩍 자신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을 회피하는 주연의 행동들이 미치도록 거슬리고 신경 쓰였다. 그래서 괜히 게임할 때만 되면 주연의 옆에 가 서서 팔목을 붙잡았고, 도시락을 들고 주연의 옆자리를 차지했으며, 멀쩡히 본인 하는 일을 하고 있는 주연을 툭툭 건드렸다. 엇나갈 수도 있겠다는 걱정은 사실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재현 스스로도 알았지만 알 수 없는 불안함을 정의할 수 없어 팀워크 따위로 치부하며 어물쩍 넘어갔다.
재현이 그렇게 관계의 심연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무렵 주연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 보란 듯 대놓고 티를 낸 건 아니었으나 만나는 사람이 새로 생겼다는 것 정도는 같이 생활하다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심상한 감상을 삼키며 모르는 척하던 재현은 문득 주연을 붙잡아 ‘나는 완전히 정리한 거야?’ 묻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물론 그런 일을 실행에 옮길만한 배짱은 없었고…. 통화를 하러 조용히 연습실을 빠져나가는 주연의 뒷모습을 닭 쫓던 개처럼 바라봤다. 그리고 재현은 연락을 주고 받던 사람에게 잠수이별 당했다.
재현의 사정이 어떻든간에 새로운 연애가 터닝포인트였는지 주연은 망한 적도 없는 관계를 회복하려는 사람처럼 굴었다. 생색을 거하게 낸다거나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건 아니었지만 이전보다 확실히 재현을 편하게 대하려는 듯했다. 어쩌면 그게 재현만 몰랐던 동생으로서의 이주연일수도 있었다. 재현도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변주하는 관계의 양상은 처음 경험하는 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었으나 어차피 끝까지 함께 가야만 하는 사이였기에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려 했다. 불협화음도 계속 듣다 보면 맞다고 착각이 드는 것처럼.
크리스마스 시즌만 돌아오면 자신에게 고백하던 앳된 얼굴의 이주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홀로 숙소를 지킬 거라고는 재현도 상상하지 못했던 거라. 시소에 앉은 재현을 꼭대기까지 올려놓고 홀로 쏙 내뺀 주연 덕분에 그대로 추락해 주저앉은 기분은 솔직한 심정으로 조금 더러웠다. 매년 홀로 숙소를 튀어나가는 주연이 얄미워 죽을 것만 같았다. 독립을 하면 나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애석하게도 재현은 주연의 집과 제일 가까웠고 언젠가부터 한시도 혼자 못 있겠다며 매일같이 재현의 집으로 퇴근해 영역을 넓히는 고양이처럼 물건을 하나씩 사두기 시작하는 주연을 내버려 두며 재현은 생각했다. 그냥 이대로 사귀면 안 되나?
나진짜너때문에엉망이야
네가나한테고백한뒤부터정신병걸린것처럼지금까지신경쓰여
진짜내인생에서도움이안되는답도없는애야넌
라고 할 수 없어 웹드라마 대본 연습을 도와준다며 소파에 나란히 앉아있던 주연의 목덜미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단순한 충동도 화풀이도 아니었다. 재현은 정말로 한계였고 골몰한 표정으로 덩달아 대본에 집중한 잘빠진 얼굴이 못내 사랑스러워 보여서. 솥뚜껑만 한 손에 의해 종이 대본이 형편없을 정도로 구겨지는 걸 한번,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우주 같은 눈동자를 한번 바라본 재현이 ‘주연아 우리 사귀자’라고 하기도 전에 멱살이 붙잡혔고 입술이 다시 한번 맞닿았다.
그렇게 긴긴 시간을 돌아 연인이 되는 걸로 해피 엔딩을 맞이하는 줄로만 알았으나.
“집에 좀 가라.”
”이게 읽고 싶어서….”
”뻥치네.”
졸려어. 주연은 감기약만 먹으면 졸음이 쏟아진다며 읽고 있던 책을 협탁 위에 두고 소파에 길게 드러눕는다. 사놓고 읽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괜히 할 말 없으니 자는 척이다.
“밥은.”
”영훈이 형이 사주던데.”
약이 든 종이박스를 들어 안쪽을 바라본 재현이 테이블 위에 던지다시피 내려놓자 주연이 고개를 들어 빼꼼히 바라본다. 내가 사준 건 싫다더니. 유치한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 아랫입술만 질겅질겅 씹어대던 재현이 참지 못하고 기어이 부글부글 끓는 속내를 내비쳤다. 내가 사준 커피는 싫고 걔가 사준 밥은 맛이 좋디?
”형 거 포장해왔는…, 왜, 왜 화내?”
화내는 거 아니고 서러운 거거든. 재현이 주연이 누워있는 곳까지 다가와 참지 못하고 가오 하나 없는 말을 툭 내뱉었다. 물론 0.5초 만에 후회했다. 서로 보지 않아도 될 꼴까지 다 보고 살았다지만 연인이 된 이상 제일 멋있어 보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주연의 기분은 어쩐지 좀 좋아 보였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분하다고 해야 할지 헤매고 있던 찰나 급속도로 표정을 굳힌 주연이 턱으로 부엌 쪽을 가리킨다.
“밥이나 먹어.”
”밥이나?”
”형도 목 부어서 못 먹겠으면 말고.”
저거 내 돈으로 산 거니까 그렇게 억울하면 버리든가. 살벌한 일갈 뒤 당연하다는 듯 찾아온 정적 속에서 재현의 시선이 툭 떨어진다. 혀를 꾹 깨문 재현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주연이 시킨 대로 부엌으로 얌전히 돌아간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커다란 등짝이 퍽 서글프게 느껴졌다.
”아 진짜 킹받아.”
재현이 사 온 트리 모자가 찬희의 머리 위에서 정신없이 흔들리자 옷소매로 손등까지 가린 주연이 실실 웃는다. 찬희가 한숨처럼 웃으며 벗으려 하자 사방에서 이거 다 찍을 때까지 쓰고 있어야 한다며 만류했다. 순서는 빠르게 넘어가 주연이었다.
”아니 내가 진짜 안 사려고 했는데 그건 나도 좀 그런 거 같더라고. 그래서 뭐냐면.”
학년이 패딩 주머니를 뒤적여 꺼낸 건 검지에 낄 수 있는 미니 손모형이었다. 내가 진짜 형 생각 많이 했어. 주연의 검지에 딱 맞게 끼워진 손모형에 주연이 입술을 감춰 물다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린다. 와앟 진짜 쓸모없다! 어디서 이런 걸…. 아직도 믿기지 않는지 모형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폼을 재현이 산신령마냥 큰소리로 웃으며 보다가 째림 당했다. 해놓은 짓이 있어 머쓱하게 코를 훌쩍이며 웃음을 멈춘 재현이 “넌 누군데.” 묻자 주연이 인형 하나를 가볍게 던졌다. 재현의 손안에 가볍게 안착한 건 홍학 인형이었다. 너 진짜 나야? 엏.
“그거 내 거야.”
목이 긴 홍학의 모가지를 쥔 채 다소 멍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집어 드는 재현의 뒤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연신 눈치를 보며 말을 붙일 타이밍을 찾던 재현이 표정을 갈무리하며 주연을 붙잡으려 했으나 야속하게도 핸드폰만 쏙 빼간다. 주연에게 철저하게 배제 당하는 일이 낯설어진 재현은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찾아오는 듯했다. 눈에 띄게 살이 내린 주연에게 차마 성질을 낼 수는 없어 그저 제 볼 안쪽만 질겅질겅 씹어댔다.
앨범 준비로 일정이 남은 주연을 두고 홀로 퇴근한 재현이 거실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정물처럼 앉았다. 눈이 작아지는 안경을 끼고 새로 들어온 대본을 뒤적이다 이내 곧 불을 꺼버렸다. 집중력이 바닥을 치다 못해 땅을 팠다. 그래서 홍학 인형을 품 안에 끌어안고 주연이 나오는 방송을 봤다. TV 불빛이 무표정한 재현의 얼굴 위로 넘실댔다.
꼭 걔랑 가야 돼?
그걸 내가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재현 또한 생각했다. 오피셜로 기사가 나지 않는 이상 좁은 업계에서 일하다 보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이고 재현 역시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몇 번 있었으니. 그러므로 일본으로 겨울 여행을 가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 주연의 동행이 이전에 주연과 썸을 탔던 남자 배우라는 사실 같은 거 속으로 울분 삭이며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같은 방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나 영상통화 뒤로 비치는 뺀질한 얼굴에 속이 마구잡이로 긁히는 것조차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쿨하지는 못해서 애꿎은 주연에게 된통 신경질을 부렸다.
형 나 지금 일하러 온 거야. 누가 지금 그걸 몰라서 이러나. 일이면 이해해 줄 수 있다고 시들하게 굴던 지금까지의 연애관을 정통으로 비껴가는 일련의 상황에 재현 스스로조차 당황스러웠지만 그런 걸 논리적으로 생각하기보다 일단 불같이 화를 내고 봤다. 원래 이렇게 이해 못 하는 쪼잔한 스타일이었냐 묻는다면 부정하지 못할 정도로.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는 신신당부에도 끝끝내 감기를 달고 귀국한 주연의 발간 얼굴이 재현에게는 홈런이었다.
빨간 코끝을 달고 수프 카레를 먹는 주연의 수더분한 얼굴이 화면에 크게 잡혔다. 저러니까 감기에 걸리지. 재현은 들어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는 음식을 이주연은 맛있다며 환히도 웃는다. 저 씹새끼…. 주연의 맥주잔에 건배를 하는 느끼한 얼굴을 노려보던 재현은 서러움에 눈물이 퐁퐁 날 것 같아 마른 얼굴만 벅벅 문질렀다.
화장기 하나 없는 맨 얼굴로 카메라에 대고 인사를 하는 주연을 마지막으로 프로그램이 끝이 났다. 손을 흔드는 순한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재현은 이전에 주연이 누워있던 것처럼 똑같이 몸을 말고 누웠다. 창밖으로는 역대급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거라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벌써부터 솜뭉치 같은 눈송이들이 휘날렸다. 눈이 내릴 때마다 낭만이라고 얘기하며 설렘을 비추는 마른 등과 동그란 뒤통수가 더럽게 보고 싶었다. 매일매일 고집스럽게 멋대로 자리를 차지해놓고 오늘 같은 날은 왜 없는지 주연이 야속하고 원망스럽고 미웠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주연이 그간 사두었던 물건들을 홍학 인형 옆에 나란히 진열했다. 혹시나 이 핑계로 주연이 와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재현은 정말…, 절박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따위가 아니라 이주연이.
그러나 주연은 그다음 날까지도 재현의 집에 오지 않았다.
”현재 씨는 내일 뭐해요?”
최 피디가 라디오 녹음을 마치고 나오는 재현을 붙잡고 은밀히 물었다. 커피를 들고서 각자의 일정들을 읊어대기 시작한 작가들 틈에서 재현은 스케줄이 있다며 적당한 대답을 내놓았다. 스케줄이 하루 종일 있지는 않을 거 아냐. 너스레를 떠는 건지 빈정거리는 건지 모를 말에 “제가 집돌이라….” 웃으며 말하자 화제는 금방 전환되었다. 그러다 대화의 내용이 재현의 칭찬으로 튀어 하하 사람 좋게 웃으며 고개를 연신 숙여댔다. 이런 데에는 여전히 면역이 없어 귓가가 홧홧했다.
하루 종일 야외에서 얼어붙었던 몸은 매니저가 미리 틀어둔 히터에도 쉽게 녹지 않았다. 패딩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켜 제일 상단에 떠있는 메시지를 확인한 재현이 입술을 꾹 눌러 슬며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끌어내리려 애쓴다. 나 집에 왔는데. 당장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애써 잠재우며 굳은 손으로 답을 하려던 찰나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눈 온다
창문을 내려 쌓이는 눈을 바라보던 재현은 골몰한다. 눈사람이라도 만들어 갈까. 좋아할 텐데. 아니, 눈 맞으러 같이 나가자고 해야지. 감기는 다 나은 건가. 쓸모 하나 없이 내리는 쓰레기에 불과하던 눈이 순식간에 낭만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주연. 형 왔다.”
소파에 올려두고 나왔던 인형을 든 채로 주연이 재현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그리고 그때. 플라밍고가 모가지를 꿈틀거리며 재현의 꼬질꼬질한 말투를 반복 한다.
미안해애…. 내가 다 잘못해써엉….
수치도 모르고 울려 퍼지는 제 목소리에 눈을 느리게 끔벅이며 가만히 선 재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귀엽네. 무심한 감상이 재현을 더 부끄럽게 만든다는 걸 주연은 알까.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주연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 있어서.
내 옆에 앉아
전원을 끄기 전에 엉덩이를 흔드는 곰돌이 이모티콘과 함께 주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은 없었으나 다행히도 읽었다는 표시가 바로 떴다. 커다란 원형 테이블에 먼저 자리 잡은 재현은 연신 제 뒤를 바라보며 주연의 행방을 찾았다. 일렬로 선 줄 제일 끝에 서있는 주연을 향해 형형한 눈빛을 쏘았다. 제발 제발. 목구멍 안쪽이 바싹 타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바람대로 재현의 어깨를 짚고 선 주연이 숨을 내쉬며 옆자리에 얌전히 앉는다. 눈이 마주치자 짙게 칠한 길따란 눈꼬리가 유려하게 휘어진다.
화려하게 색의 조명이 물드는 주연의 옆태를 연신 힐긋거리던 재현이 장난삼아 주연의 어깨를 툭 건드린다. 무구한 눈동자가 재현을 온전히 담는다. 끝끝내 제대로 된 화해도, 크리스마스에 그 새끼를 만나러 갈 거냐는 유치한 물음도 뱉지 못했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귀가 먹먹할 정도의 환호와 불꽃의 탄내 속에서 제 옆을 채워주는 주연의 존재만으로도 안정과 만족감이 차올랐다. 재현이 눈 밑에 자국을 내며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뭐 이런 날까지 같이 퇴근을 하냐는 물음에 멋쩍게 웃으며 차에 올랐다. 이미 자정이 훌쩍 넘어 허무하게 크리스마스를 맞이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패딩 아래로 은근슬쩍 손끝을 톡 건드리자 따뜻한 체온이 대번에 손을 잡아온다. 거세게 흩날리는 눈발에 집까지 가는 길이 한참이었으나 그마저도 로맨틱했다. 한 손으로는 배달 어플을 뒤지며 얽힌 손가락에 힘을 꾹 줬다.
‘나 홀로 집에’가 나오는 영화채널을 틀어놓은 채 피자를 먹던 주연이 대뜸 나 억울해, 말한다.
“뭐가.”
”시간 날린 거.”
주연은 제가 먼저 재현을 좋아했던 시간들을 곱씹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크리스마스를 날린 횟수로 따지자면 재현이 더 많았지만 구태여 말하지 않는다. 주연의 지난 짝사랑 앞에서 재현은 힘이 없다.
“그래도. 같이 있으니까 좋다.”
담담한 목소리가 재현을 물들인다. 재현이 불현듯 주연의 손을 붙잡아 박박 닦아낸 뒤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양치하자. 주연이 대량으로 산 노란색 칫솔과 파란색 칫솔을 각각 물고 나란히 선 모양새가 웃겨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눈물방울이 맺힐 정도로 화한 민트향을 풀풀 풍기며 입술을 쪽쪽 빨았다. 부딪히는 코끝과 젖은 입술이 기분 좋기만 해 자꾸만 더 안쪽으로 파고들게 되었다. TV 속에서 도둑들의 옷이 찢어지고 머리가 벗겨지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이 번쩍이는 조명으로 쓰임을 다했다. 주연의 몸을 허벅다리로 옭아맨 재현이 키득거리며 말하자 주연이 간지럽다며 몸을 희한한 소리를 낸다. 쪽쪽. 몸 이곳저곳에 입술이 내려앉는 소리가 퍽 요란했다.
낮에 나 두고 나갈 거야? 며칠을 묵혀두던 질문이 주연의 귓가에 속삭여졌다. 의문을 담은 주연의 눈이 헤맸다. 25일에 약속 있는 거 아니었어? 살결에 입술 묻고 우는소리를 내며 웅얼거리자 주연이 재현의 머리통을 밀어낸다. 뭔 소리야. 올해 들어 제일 빠르게 말한 주연이 재현을 보챘다. 이에 메시지를 봤다며 솔직하게 털어놓은 재현이 최대한 안쓰러운 표정으로 주연을 올려다봤다.
“그렇게 봐도 안 예뻐.”
”언제는 얼굴이 젤 좋다며.”
”그게 몇년 전이냐.”
”야!”
울컥한 마음에 큰 소리를 내자 주연이 애처럼 웃는다. 아니, 하, 근데 쫌 어이없네. 내가 형을 두고 25일에 걔를 왜 만나. 주연의 품 안으로 몸을 욱여넣어 파고드는 재현의 목덜미를 긴 팔로 휘감아 끌어안은 주연이 눈을 길게 휘며 소리 없이 웃었다.
잠긴 목소리로 한참을 웅얼거리다 잠이 든 주연의 몸 위로 커다란 이불을 덮어준 그 옆에서 재현이 분홍색 인형의 버튼을 꾹 누른다. 형편없는 제 목소리가 나올 거라는 예상과 달리 한참 고요하다. 그리고,
형 몇 년 만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래. 눈사람 만들자.
… 메리 크리스마스
세상을 하얗게 뒤덮는 눈송이들과 주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재현의 징크스를 푸는 마법처럼 느껴졌다. 더없이 사랑으로 가득한 크리스마스였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