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上)

소킨
모두에게 최초의 기억이었다. 그 풍경은 자리에 서 있던 이들이 태어나 처음 보는 그런 광경이었다. 참으로 멋드러집니다. 짙은 녹색 도포를 입은 내관이 두 손을 모으며 중얼댔다. 그의 말처럼 눈앞은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 유려하게 휘어져 올라간 기와와 청록색 단청에는 조그마한 전구가 걸려 있었고, 정원 한가운데 솟은 소나무에는 붉은색 푸른색 실타래들이 칭칭 감겨 있었다. 거기에 정원을 한 바퀴 빙 둘러 밝게 켜진 호롱불이 한층 아름다움을 덧댔다.

“동궁전에 오길 잘했습니다.”
“난 눈치보여 식은땀이 다 흐른다 야..”

뒤에서 조그맣게 쑥덕대는 나인들 이야기는 귀에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세자는 뒷짐을 진 채 근정전에서 동궁전 입구로 향하는 길목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말간 얼굴엔 의중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한 분위기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얇상한 입술은 일찍이 제 이빨에 짓이겨져 핏기가 가신지 오래였다. 세찬 겨울바람에 남색 용포자락이 매섭게 펄럭였다.

“눈이 오기 시작하네.”
“날이 추운데 이제 그만 안으로 드시지요.”
“아직 양력으로 25일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저하, 하오나..”
“주연이가 오늘까지 온다 했다.”

깜깜한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 든 세자의 콧잔등 위로 진눈깨비 같은 눈자락이 떨어졌다. 서양에는 성탄절이라는 게 있답니다. 제가 전장(戰場)에서 돌아오는 날 저 나무를 어여쁘게 꾸며주실 수 있을까요. 보러 꼭 오겠습니다.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울리는 듯 했다. 아직 25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반나절이 남았다. 손과 발이 나가 떨어질듯한 추위였지만, 세자는 기다릴 작정이었다. 약조했으므로.


1882년 12월 25일. 그날은 조선 왕실에서 처음으로 비밀리에 크리스마스를 기념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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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종(豪宗) 12년. 세자가 죽었다. 궁궐 안팎으로 창자가 끊어질 듯한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호종과 중전 사이에서 난 첫째 세자 이환민은 왕이라는 명패를 손에 쥐고 태어난 사람 같았다. 문예와 무예에 모두 재능을 보였고, 회강땐 모든 대신이 감탄할 답을 내놨다. 병약한 체력으로 우려를 사는 세자들도 있었지만 환민은 체격도 좋고 건강했다. 한마디로 환민 말고는 그 누구도 현왕(賢王)으로 당시의 태평성대를 이끌던 제 아비의 뒤를 이을 수 있을 것이라 사람들은 생각지 않았다.

“진짜 형이야?”
“대군마마. 고정하십시오.”
“형...형아...”

반듯하게 누운 환민의 앞으로 달려가며 조용히 울음을 뱉는 주연을, 재현은 텅 빈 눈동자로 바라봤다. 매서운 한겨울의 칼바람이 스산한 분위기를 더했다. 재현은 주연에게 머물던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저를 흘깃거리던 눈동자들이 바삐 움직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리에 있는 궁인들 중 팔할은 차라리 제가 대신 죽었으면 했을 것이다. 저를 의심하는 눈초리들도 느껴졌다.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 사이 사이 아직도 며칠 전 칠갑된 환민의 핏자국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넉 달에 한 번 있는 의례적인 시찰에서 세자는 죽었다. 보안유지 차원에서 병사들은 원칙상 3분 거리에 떨어져 둘을 따르고 있었으므로, 환민의 죽음을 목격한 것은 재현이 유일했다. 어차피 병사들이 가까이 붙어 있어도 소용은 없었을 터였다. 검은 갓을 쓴 무리의 실력은 본 적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도성 안팎으론 그들을 수배하는 글이 걸렸다.


“정의군 마마.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잠시 의금부에 함께 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재현은 잠시 숨을 고르고 답을 했다. 뒤에선 어마마마.. 하고 주연이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재현을 보필하는 강내관은 의금부로 향하는 길에 재현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지만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의례적인 조사였고 제가 의심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정의(正義)군. 그것은 재현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궁에서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저를 그리 불렀다. 어머니인 정빈 최씨는 간택후궁으로 중전과 같은 해 재현을 잉태했다. 최씨와 좌의정인 그녀의 아버지는 재현과 환민이 동갑임에도 외가 혈통의 차이로 평생의 운명이 갈린 걸 천추의 한인 것처럼 이야기하고는 했는데, 재현은 그럴 만한 일인지 늘 의문이 들곤 했다. 제 몫이 아닌 것에 과한 치기를 부려 화를 당한 선례들을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에. 어차피 제가 환민보다 10년을 일찍 태어났어도 세자의 자리는 환민의 것일 터였다.







“요즘도 끼니를 건너 뛰는 거냐.”
“어..형님.”

호숫가에 쭈구려 앉은 채 오리를 구경하던 주연이 무릎을 털고 일어섰다. 세자가 떠난 지 일주일. 여전히 주연이 밥때를 거르고 잠도 잘 자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제 형처럼 뼈대가 굵어 덩치가 있었는데 살이 얼마나 빠졌는지 그새 야위어보였다.

그래도 대군마마 곁에 정의군 마마가 있으셔서 다행이야. 자네 정의군 마마에 대한 소문은 못 들었는가.. 설마 정의군 마마께서 그러셨겠어. 조사도 받으셨는데 뭐 없다며. 나란히 선 둘을 쳐다보며 궁인들 제각기 분분한 의견을 내놨다.

“전 건강해요. 괜찮습니다.”
“하나도 안 괜찮아보이는데.”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퉁명스러운 말투에 주연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슬픔에 취약한 모습을 보일수록 주연에게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팔자 좋게 오리 구경이나 할 때냐고.”
“삼색이가 오리를 보고 있더라고요.”
“삼색이?”

재현의 눈썹이 꿈틀댔다. 삼색이는 원래는 궁 안을 어슬렁거리던 길고양이였으나 주연이 봐주면서 형제가 함께 길렀고, 이름은 환민이 붙여준 것이었다. 정말로 오른편에 삼색이가 오리를 보고 있었다. 엄청 열심히 보더라고요. 주연이 희미하게 웃었다.


“삼색이는 삼색이고, 이거.”

재현이 다시 퉁명스러운 투로 도포에서 과자가 든 네모난 통을 꺼내 주연에게 쥐어줬다. 가늘던 주연의 눈이 커졌다. 그건 미리견(미국)에서 특별히 들여온 것으로 주연이 좋아하는 것이었다. 워낙 귀한 것이라 궁내에 높은 사람조차 통신사에게 꽁돈을 쥐어주고 따로 부탁해야만 구할 수 있는 과자였다.

“이걸 어찌...”
“네 형이, 저하가 남기고 간 거야.”
“......”
“그러니까 꼭 먹거라. ..삼색아.”

괜히 무안해진 재현이 삼색이를 한 품에 안아 들어올렸다. 못 본 새 뚱뚱해진 거 봐. 니 형은 말라비틀어져 가는데, 저래서 세자는 어떻게 하려고 그지? 주연은 과자 상자를 손에 쥔 채 그런 재현을 바라봤다. 주연이 그 말이 거짓임을 알아차리기까진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미리견에 적대적인 외교관을 가졌던 제 형이 값비싼 그 나라 간식 따위를 따로 들여올리 없었다. 굳이 거짓말을 해야 할 대단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이상하리만치 손에 힘이 강하게 들어갔다. 그 힘에 종이로 된 상자에선 바스락 소리가 났다. 속이 울렁거렸다. 먹은 게 없는데도 뭔갈 게워내고 싶었다. 재현의 품에 안긴 삼색이가 뻣대며 그르렁대는 소리가 호숫가에 웅웅 울려퍼졌다.



“아니, 제가 몇 번을 말씀드려요!”
“그래서 살결에 안 닿게 잘 안았는데에”
“데에..왜 팔뚝이 울긋불긋 한데요? 예?”

이놈의 마마 또 삼색이 보러가셨네. 맞죠? 다른 마마님들은 돼도 정의군 마마는 두드러기가 있어서 안된다하지 않았습니까. 나무라는 윤의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재현은 연고를 한 움큼 덜어내 익숙한 솜씨로 발랐다. 내가 바르면 되잖아!

“저놈의 불같은 성질머리로 삼색이는 왜 그렇게 좋아하시는지 원. 이해가 안가네요 정말.”
“야 성질 더러우면 고양이도 못 좋아하냐?”
“지난번에 강내관이랑 중궁전 가시는 길에 본 고양이 두 마리는 본체도 안하셨다면서.”

연고를 바르던 재현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윤의관은 제가 너무 심했나 싶어 입을 다물었다. 재현은 무언갈 가만 생각하다 다시 쓱 소매를 걷었다.

“삼색이는..귀여워서 어쩔 수가 없어.”
“그, 그러니까 다음부턴 조심 좀 하시라고요.”
“응. 그럴게.”

웬일로 말투는 고분고분 했지만 어쩐지 좀 착잡한 대답이었다고 윤의관은 생각했다.



삼색이가 먼저였나, 이주연이 먼저였나, 둘 다였나. 아니면 삼색이가 이주연인가. 밤을 집어삼킬듯 밝은 달빛을 쳐다보며 재현은 생각에 잠겼다. 이주연은 이 나라의 왕인 호종과 중전 사이에서 난 둘째 왕자로 환민의 친동생 수운(水澐)대군. 제가 금수저라면 다이아수저인 주연에게 재현은 요상하게 마음이 가곤 했다. 마음이 쓰이는 애였다. 그리고 궁금했다.

왕자들끼리 모여 달리기 시합을 할 때 1등하겠다고 떵떵거리다 제 도포자락을 밟아 고꾸라지고, 남 놀리기 좋아하는 진성군 말에 속아 넘어가 금붙이를 헐값에 팔고, 유학서를 소리내 읽다 발음이 히읗자로 새나갈 때. 이 세계 밖에 또 다른 생물이 있다던가 엉뚱한 말을 할 때. 무안한 행동을 하고서 그에 맞지 않는 시원한 웃음을 내보일 때. 재현은 자기도 모르게 푸학하고 웃게 됐다. 왕자들 교육을 담당하는 사부가 크흠, 경박스러운 웃음소리는 좀 고치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그 소리에 헛기침을 할 때면 되레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연을 보는 게 갑갑한 궐 안의 소소한 재미가 됐다는 걸 알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였다. 저와 느끼는 감상도, 사고회로도, 속도도 너무 다른 그 애를.

야 나도 껴줘. 처음 환민, 주연과 나머지 왕자 셋이 옹기종기 모여 삼색이를 구경한 걸 본 재현은 잰 걸음으로 달려가 주연과 충민군 사이를 비집고 자리를 차지했다. 제가 고양이 두드러기가 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보란듯 그날 삼색이를 만지고 또 만졌다. 형님도 고양이를 좋아하십니까? 이건.. 제 추측인데 예전에 검고 흰 고양이와 황색 고양이가 궁에 있었거든요, 아무래도 둘이 새끼를 만든 것 같습니다. 신기하지요? 그래 정말 신기하구나. 관찰력이 대단한걸. 느릿한 박자로 찬찬히 말을 잇는 주연을 빤히 보며 한참을 쓰다듬다 일주일을 고생했었다.


“마마. 비가 떨어집니다. 창을 닫으시지요.”

얼마나 깊게 몽상에 잠겨 있었던지 재현은 제 뺨을 내리치는 빗줄기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허겁지겁 창을 닫다 어둠 속 빗줄기 사이로 이명처럼 환민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멈칫했다. 제 무릎에 머리를 뉘인 채로 피를 토하며 당부하던 말들이.


주연이..잘 부탁해..
그게 무슨 나약한 소리야. 빨리 정신 차려
내가 죽으면 주연이가 내 자리에 앉게 될테니까..
너는 그대로 세자하고, 주연이도 내가 챙길게.
하하..그러게 내가 별 걱정을 다..
......
야. 이재현.
뭐.
너 다 티나.
뭐가.
주연이, 쿨럭, 다르게.. 보는거.



그러니 환민의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주연을 아끼는 마음의 무게를 단다면 왕자들 중 환민 다음으로 제가 둘째일 터였다. 꼭 지켜줘. 재현은 눈을 감고 환민이 입었던 남색 용포를 입은 주연을 상상했다. 궁인 열댓명을 달고 궁중을 거니는 모습을 상상했다. 시강원에 홀로 앉아 책을 외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다 세자빈을 맞는 모습을 상상했다. 눈이 떠졌다. 어쩐지 그림이 안 그려졌다. 보살핌 받는 게 아닌 한나라를 보살피는 이주연이라. 그래도 한가지만은 확실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환민과 약속한대로 주연의 곁에 있을 거라고. 그가 어떤 왕이 되든.







자꾸만 늦춰지는 세자 책봉식에 궁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하루라도 빨리 수운대군을 세자자리에 앉혀 혼란을 꺼트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는 대신들과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대신들이 맞섰다. 임금과 신하가 나랏일을 논의하는 사정전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통촉하여주십시오-전하. 아니되옵니다-전하. 외치는 대신들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왕자 교육은 일주일 전 재개됐지만 주연은 드문 드문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다. 어차피 빠른 걸음으로 한다경이면 당도할 수 있는 게 주연의 처소라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으나 재현은 어쩐지 섭섭했다. 자꾸 수업을 듣다 고개가 주연이 오는 길로 향했다. 주연을 보필하는 김상궁에게는 진즉 좋아하는 반짓고리를 하나 쥐어주고 소식을 엿듣는 참이었다. 오늘은 좋아하는 고기반찬이 나와 많이 잡수셨습니다. 새벽에 잠을 좀 뒤척이셨습니다. 산책은 매일 하고 계십니다. 미리견 과자는 하루에 반쪽씩 아껴드셨습니다 등등. 예전보다 잘 먹고 잘 잔다니 다행이었다.

혹 나를 찾진 않느냐? 괜시리 슬쩍 물어보고 싶은 적도 여러번이었으나 정의군의 정자도, 재현의 재자 조차 꺼내지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올까 무서워 관뒀다. 괜히 속 좁게 열불터지기는 싫었다는 말이다. 참내. 재현은 소리내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이리 제 형 명령에 충실하다는 걸 알아야할텐데. 가만 보면 주연은 다른 사람들한테는 고분고분하면서도 제게는 유독 뻣댈대가 많았다. 마치 삼색이처럼. 환민에게는 형님, 형님 호칭을 잘도 붙이면서는 제게는 은근슬쩍 재현아, 라고 부른 적도 더러 있었다. 주연이 세자에 오르더라도 둘 있는 자리에선 꼭 형님이라 부르라고 해야지. 재현은 다시금 결심을 다진다.



“바로 처소로 들어가시겠습니까.”
“오늘은 수운대군 처소에 들렀다 가겠네.”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내관 둘이 자리에 멈춰 서 재현과의 거리를 넓혔다. 왕자들끼리 자유롭게 회포를 풀 수 있도록 정해진 암묵적 규칙 같은 거였다.

적통왕자인 주연의 처소는 재현의 처소보다 약 1.5배 정도가 넓었다. 가까운 거리에는 인공으로 만들어진 개울도 있고 작은 정원도 있었다. 산책하기를 좋아하는 주연의 취향에 맞는 것이었다. 근처에 들어서니 주연에게서 나는 것과 같은 들풀 향기가 났다. 주연이 밤산책을 나왔을까? 재현은 목을 길게 빼들고 입구 앞에서 요리 조리 처소를 훑었다.


“정의군 형..이십니까?”

가까운 거리인데도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주연이 저를 불렀다. 눈이 마주쳤다. 어.. 나야. 훔쳐본 것도 아닌데 괜히 뒷목이 뜨끈 달아올랐다. 주연은 처소 앞에 서서는 검은 하늘을 구경하고 있었다.

“산책이나 할까? 네 처소 앞 개울이 생각나서.”
“전 아까 걸었습니다. 혼자 다녀오시지요.”

당연히 주연이 저를 뒤따라올 거라 생각하고 앞장서 걷던 재현의 발걸음이 자리에 우뚝 멈췄다. 덩달아 급제동이 걸린 강내관과 유내관은 하마터면 저들끼리 동선이 꼬여 넘어질 뻔했다.

“야.. 좀 같이 가주지.”
“배가 고픕니다.”
“방금 저녁상 나가는 걸 봤는데?”

재현이 얼척 없는 얼굴로 주연을 쳐다봤다. 제가 한 말이 그저 재현을 떼어 놓기 위한 핑계였음을 들킨 주연의 얼굴은 시뻘겋게 변했다. 사실 상을 본 건 아니고 시간을 유추해 어림잡아 말한 것 뿐이었다. 배고프긴 개뿔 표정도 못 숨기는 주제에..하지만 재현은 괘념치 않고 주연의 팔을 잡아당겼다. 너 산책했단 것도 거짓말이지? 그러니까 일단 걷자.

개울가까지 향하는 길에 주연은 제 오른팔을 재현에게 맡긴 채로 침묵했다. 원래도 말수가 적은 편이었으나 환민과 저와 있을 때면 그래도 편한 사람들이라고 실없는 이야기를 잘도 떠들어댔는데 세자가 그렇게 된 이후로는 제 앞에서도 통 입을 열지를 않았다. 졸졸졸 실개천 흐르는 소리와 재현과 주연의 풀 밟는 자박한 소리만이 깜깜한 고요를 채웠다.

“이렇게 제멋대로이시니 나라가 큰일이네요.”

개천에 도달해서 주연은 참았던 숨을 토하듯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입을 앙 다물었다. 꽉 다문 탓에 위로 말려 올라간 독특한 입매가 두드러졌다.

“나라가 큰일이라니?”

재현은 직감적으로 주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무슨 소리냐고. 묻고 또 되물었다. 저를 똑바로 쳐다보는 재현의 눈길을 피하는 주연의 눈동자 위에 달린 속눈썹이 떨렸다.

“정말로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뭐가.”
“다들.. 형이 세자가 될 거라 합니다.”
“..주연아.”
“정말인가요?”

재현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세자 책봉이 늦춰진다는 것은 권력의 흐름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뜻이었다. 주연도 듣는 귀가 있으니 눈치채는 게 당연했음에도 재현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믿고 싶었다. 정확히는 주연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원망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다.



며칠 전이었다. 푸르스름한 새벽 은밀한 얼굴로 좌의정과 최씨가 재현의 처소를 찾았다.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불길한 예감을 감지하며 재현은 보랏빛 도포를 걸치고 제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예를 갖췄다. 그러나 머지않아 인상을 구기고 못마땅한 얼굴로 좌의정과 최씨를 꼿꼿이 쳐다봤다.

“어찌 하나뿐인 손자에게 역모를 말하시는지요.”
“마마 그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세자가 죽으면 왕자들 모두 암묵적인 세자 후보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세자 경합에 참여하라는 것인지요?”
“......”
“아니지 않습니까!”

안그래도 궁 안에서 크기로 소문난 재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처소를 넘어 복도에까지 울렸다. 고정하세요. 궐 안의 사람들 모두가 듣겠습니다. 최씨는 한심하다는 투로 재현을 흘겨봤다. 정빈 최씨. 살면서 누군가에게 지고 산 적 없는 그녀는 왕실에서도 2인자로, 중전의 그림자로 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입궁 하던 날부터 그녀는 줄곧 이 순간을 꿈꿔왔다. 짙은 갈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한편 그녀의 마음을 조금도 읽지 못하는 듯 재현은 몸을 반쯤 돌려 어제 읽다 만 책을 협탁 위에 올렸다. 그만 나가라는 암묵적인 신호였다. 조금도 상처받지 않은 얼굴로 최씨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저희가 찾아온 건 풋내기 같은 마마의 허락 따위를 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마마의 의사는 애초부터 중요하지 않았으니까요.”

재현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책장을 넘겼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마마는 결국 세자가 될 것입니다. 권력이란 그런 것입니다.”

저를 내려다보며 웃는 어미의 얼굴이 섬뜩했다.



하지만...

“아니야.”

결국 중요한 건 제 의사일 터였다. 제가 두 손 두 발 다 들고 안하겠다고 하면 어쩔 셈인가. 재현은 주연이 확실하게 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말을 뱉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꾹 쥔 주연의 두 주먹은 제 손으로 감쌌다. 아까 날이 쌀쌀하더니 정말이었나보다. 손이 까슬하고 차가웠다. 그는 화났다기보다 슬퍼보였다.

“그런 헛소문 믿지 마.”
“헛소문인가요?”
“내가 싫다면 그만이다.”
“형님은 왕이 되고 싶으신가요?”

예상치 못한 주연의 다음말에 재현은 할말을 잃었다. 질문에 하라는 답은 안하고 자기 할말을 하는 주연만의 화법이다. 평소였으면 소리내 호탕하게 웃었을 터인데 그럴 수 없었다. 대신 재현은 주연의 질문을 곱씹었다. 어린 시절 형제들과 아버지 용상 위에 장난삼아 앉아봤던 기억을 꺼낸다. 대신들에게 들켜 각자 어머니들에게 매질을 당하고 다음날 다시 그곳을 형제들과 찾았을 때 마음 속에서 무언가 끓어올랐던 것 같긴 하다. 그렇다 해도,

“아무리 왕이 되고 싶어도, 비겁하게는 안 해. 그럴 생각 조금도 없어.”
“......”
“그런 자리라면 백 번 줘도 거절할거야.”

주연은 우는 듯 웃는 듯 애매한 얼굴을 했다.

“그럼 저와 한가지만 약조해주시겠습니까.”
“무엇을 말이냐.”
“저희 어머니는 살려주십시오.”
“아니다. 아니라고 내 말하지 않았느냐!”

재현이 언성을 높였다. 둘과 멀찍이 떨어져 앙상한 나무 밑에서 담소를 나누던 내관 셋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현과 주연을 쳐다봤다. 주연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제 앞에 처절한 얼굴을 한 재현을 바라봤다. 이제 곧 나라의 국본이 될 남자의 이런 절절한 얼굴을 볼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름답다. 갑자기 그런 시덥잖은 생각이 떠올랐다. 주연이 궁에서 나고 자라면서 깨달은 것은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그 일어날 일의 대부분은 힘과 술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다. 얼마 전 어머니의 밥상에서 독이 나왔다는 소리를 들었다. 밤중에 제 처소 주변에 검은 갓을 쓴 사내들이 돌아다녔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미 형이 죽은 날부터 권력의 균형추는 정의군의 외척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형님은 지독한 현실주의자인 것 같다가도 가끔 보면 이상주의자인 것 같습니다.”

주연이 재현의 손에 꽉 잡힌 제 손을 빼내서는 재현의 손 위로 포갰다. 재현은 또 잠시고 주연의 말들이 무슨 의미인지를 읽어내려 애썼다. 주연의 말들은 저와 달리 직설적이지 않고 에둘러져 있어 행간을, 아주, 꼼꼼하게 들여다봐야만 했다. 하지만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아 재현은 읽어내려다 관두고 만다.

따뜻한 봄바람에 주연의 까만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반짝하고 달빛이 주연의 피부결에 반사됐다. 갑갑함이 밀려와 독한 청나라 술 몇 잔으로 속을 뻥 뚫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지금 제가 서 있는 곳은 주연의 처소 앞 개울가였으므로,

재현이 주연을 당겨 끌어안았다.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에 주연은 이렇다 행동을 취할 새도 없이 어정쩡하게 재현의 품에 안긴 꼴이 됐다. 재현의 고개와 양팔이 점점 안으로 파고드는게 느껴졌다. 주연을 놓치지 않기라도 하려는 듯 힘을 더했다. 빈틈 없이 완전히 밀착된 채로 주연은 재현의 심장소리를 느꼈다. 쿵. 쿵. 쿵. 재현의 심장은 그 누구의 것보다 붉고 뜨거울 것 같았다. 코로 호흡하는게 어려워 자꾸 입으로 숨을 뱉게 됐다.

“죽기 전에 환민이가 부탁했어.”
“......”
“너를 지켜달라고. 그러니까 세자가 되어서 널 지킬 수 있다면 세자가 될 거고, 네가 위험해진다면 내 손으로 내 목을 졸라서라도 자리에서 내려올 거다.”

형의 그 마음은 죽은 환민 형님에 대한 부채감인가요. 아니면 남은 동생인 저에 대한 책임감인가요. 아니면 세자 자리에서 팽당한 저를 동정하시는 건가요. 어릴 때부터 저를 불쑥 불쑥 파고들던 재현의 말과 행동에 마음이 이상하게 들 뛸 때가 많았다. 하도 이상해 윤의관을 찾았다가 좋아하는 여인이라도 생기신겝니까? 말도 안되는 핀잔을 들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마음이 터질 것 같은 적은 처음이었다. 빛나는 얼굴로 말하는 다정에 면역 따위 있을리 없었다. 재현은 훌륭한 국본이 될 것이다. 다만...

그렇게 아무데나 다정함을 흘리면 안된다고, 결국 오해와 기대와 착각의 불씨를 만들어낸다고 경고해줘야겠다 생각하며 주연은 그의 등을 안았다. 몇 해 전만 해도 저보다 자그만했던 등판이 넓었다.







모든 게 정해졌던 것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던, 주연의 생각처럼 좌의정 세력엔 영의정이 붙었고 대신들 중 양대산맥이 정의군을 밀고 나서니 다른 이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정의군의 성적이 수운대군보다 좋습니다. 토론 형식의 경합에선 한 번도 진적이 없사옵니다. 남다른 기개가 있사옵니다. 제멋대로라고 욕을 먹던 재현의 성정은 올곧은 뚝심으로 탈바꿈했고, 불 같은 성격은 왕으로써 응당 갖춰야할 기세가 됐다.

반면 무예에 재능을 보인 주연의 능력은 사냥을 좋아해 향락에 빠질 것이란 우려로 둔갑했고, 순한 성격은 팔랑귀라 대신들 말을 듣다 나라의 균형조차 잡지 못할 것이라는 비판거리가 됐다. 예전부터 궁 안에 암암리에 떠돌던 주연을 잉태하기 전 이틀간 출궁한 중전의 이력은 실은 주연이 호종의 자식이 아닐 수도 있다는 먹잇감으로 변모했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왕의 자리도 바꿔치기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세자의 책봉식날, 마치 독이 든 성배라도 든 사람처럼 밀랍인형처럼 앉아 있던 재현에 대신들 모두 혀를 찼다. 화려한 용포를 입은 모습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지만 얼굴엔 핏기 하나 없었다. 게다가 며칠 제대로 자지도 못한 것인지 얼굴은 죽상이었다.

대군마마랑 중전마마 출궁하시고 나서부터는 매일 저 꼴이었네, 좌의정 말만 믿고 정의군을 밀긴 했지만 이게 맞는 건지 원 대신들이 수군댔다. 한마디 하셔야지요. 재현은 미간을 좁히고 앉아 있다 정빈 최씨의 말에 정신을 차린다. 그녀 얼굴은 꼭 뱀같다.



“선택하십시오.”
“무엇을 말입니까?”

그것은 재현이 태어나 처음 한 거래였다.

제게 수운대군이 적통왕자가 아니라는 아주 중요한 증거가 있습니다. 이걸 까발리면 중전과 수운대군은 모두 숙청을 당하겠지요? 또 다시 새벽이었고, 재현의 처소였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재현이 최씨를 쳐다봤다. 다만, 마마께서 세자를 하신다 하면 이 사실은 영원히 비밀에 부치겠습니다. 왕실에 그런 흉흉한 소문이 떠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저급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어미에 재현은 진절머리가 났다. 제가 언제 허황된 말을 한 걸 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럼에도 최씨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만일의 하나라는 가능성 때문에. 의심이라는 마음 때문에. 최씨의 당당한 태도는 무시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날 밤 재현은 꼬박 밤을 샜다. 왕자들끼리 무술 경합이 벌어지는 날에도, 아버지 앞에서 독경을 해야하는 날에도 잠만 잘 자던 재현이었다. 최씨의 말이 진실일까. 그러다 문득 저와 다른 형제들에겐 있는 발바닥 점이 주연에게만 없다는게 생각난다. 하지만 허풍일 수도 있다. 그런 중차대한 사안을 할마마마나 아바마마가 눈치 못 챘을리가 없다. 그날 밤 재현의 꿈엔 피 묻은 손으로 제 오른팔을 붙잡으며 주연이를 지켜달라 말하는 환민이 나왔다. 그래 왕이 돼 내가 직접 주연이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지키면 된다. 재현은 확실한 것에 제 패(覇)를 걸기로 했다.



“감축드립니다 저하.”
“..주연아.”
“용포가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야.”

책봉식을 일주일 앞두고 경회루 앞에서 마주친 주연은 깍듯이 재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호종이 정의군을 세자에 책봉하겠다는 발표를 한 뒤로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주연은 웃음 끝을 뭉개며 재현을 쳐다봤다. 속을 알 수가 없다. 원래 속내가 잘 드러나는 애인데 환민이 죽은 뒤부터 이상하게 읽을 수가 없다.

“내가 원망스럽지 않느냐.”
“그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겠지요.”
“그런데 왜 성질조차 내질 않느냐. 원래는 내 앞에서 툭툭 시비 잘도 걸지 않았느냐?”

재현의 말투에서 짜증이 묻어나왔다. 주연은 여전히 파동 없는 고요한 호수처럼 재현의 용포에 그려진 무늬를 쳐다보기만 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아서요.”
“...뭐?”
“형님은 눈치채지 못하셨을 수도 있지만, 아주 어릴때부터 왕이 되고 싶어하셨습니다.”

재현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본다. 예전에 용상에 마음대로 앉았다가 종아리를 맞은 다음날 다들 하나같이 이런 게 왕자리면 안한다고 엉엉 울었던 걸 기억하시는지요. 하물며 환민 형님도 그 무게감에 치를 떨었습니다. 그런데 형님은 달랐습니다. 다음날 저 멀리 반쯤 열린 대전 문 사이로 보이는 용상을 쳐다보며 웃던 형님의 눈엔 빛이 났다 합니다.

“그게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세자자리를 택하셨나요.”
“나는 너를...”

다음말을 기다리는 주연의 면전에 대고 재현은 차마 문장을 끝맺지 못한다. 재현은 순간 헷갈린다. 주연을 지키겠다는 핑계로 왕이 되고팠던 마음을 합리화한 것인가. 내 욕심 채우자고 세자 자릴 택한 것인가. 이 애를 이용한 것일까. 어릴 적부터 제일 잘하는 일이 견디는 것이라던 이 애는 또 지금 제게 씌워진 치욕을, 불합리한 상황을 견디고만 있는 것인가.

“주연아. 중전마마랑 너 모두 도성 안에서 평생 돈 걱정, 먹을 거 걱정 없이 내 살게할 것이다.”
“......”
“그러니까 나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줘. 도성 주변을 거닐다 네 사가를 찾아도 문전박대하지 말아줘.”
“제가 어찌 그런 불충을 저지르겠습니까.”
“다시 안 볼 사람처럼 이렇게 깍듯이 대하는 거. 별로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다.”

주연은 애매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재현이 참 잔인하다고 생각한다.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세자로 지명되는 순간부터 자기가 뱉는 말 하나 하나가 어명이 될 수도 있음을 그는 모르는 걸까. 그리고 재현이 또 하나 모르는 것. 주연은 죽어도 이재현을 미워할 수 없다는 것. 세자 자리에 오를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날부터 수없이 원망하려해도 제 마음의 결론은, 자꾸 재현의 따뜻했던 말과 행동들만 생각나서 괴로움만 남았다는 사실. 우스갯소리로 미리견 과자가 너무 좋아 궁에 남으면 안되겠냐고 주연은 말도 안되는 어리광을 재현에게 부리고 싶었다. 사실은 미리견 과자의 맛이 아닌 재현의 정성이, 손때가, 저를 생각해주는 마음이 담겨 좋았던 것이었음을.







비록 정의군을 세자로 미는 과정에서 중전을 헐뜯긴 했지만 모자가 궁을 나가는 날 대신들 모두 바닥에 납작 엎드려 유감을 표했다. 끝까지 정의군의 책봉을 반대한 대신들은 아이고 중전마마 하며 우는 소를 냈다. 인품 좋기로 유명한 중전에 중궁전 상궁들은 훌쩍이는 소리를 참느라 입을 꾹 막아야했다.

그나마 중전과 주연이 폐비 폐서인이 아닌 실록에는 남아 명예를 지킬 수 있는 수준에 그친 배경에는 재현이 있었다. 두 사람의 안위를 보장해주지 않으면 주연의 소문이고 나발이고 까발리던지 세자는 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덕이었다.

주연이 궁을 떠나는 날 재현은 종일 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올 수 없었다. 그 장면을 차마 볼 자신이 없었다. 주연을 지키겠다는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 해도 원래부터 제 것이 아닌 자리를 탐한 것은 사실이었다. 고개가 꺾이고 만다. 동궁전에 앉아 재현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 무릎을 나란히 모은 채 제 귀를 꾹 틀어막았다.


“마마 가셔야합니다.”

한편 아까부터 주연은 고개를 치켜들고 수백명의 대신들 중에 재현을 찾았지만 도통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그렇게 저 떠나는 걸 아쉬워 하는 것 같더니 마지막 대우가 기껏 이런 식이란 말인가. 순간 억눌렀던 억한 심정이 끌어올랐다.

“삼색이만 좀 보고 가겠습니다.”

기지에서 나온 말이었다. 아니면 간절함이 만들어낸 거짓말이었을까. 그게 무엇이든 주연은 성큼 성큼 동궁전으로 향했다. 누가 왜 그리로 가느냐 하면 삼색이가 동궁전에 자주 나타난다하면 그만이었다.


“주, 주연아.”

창밖에서 저를 씩씩대며 빤히 쳐다보고 있는 주연에 재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왜 나오지도 않으십니까? 이제 저 같은 천한 건 보기도 싫으시다는 건가요? 주연의 언성이 높아진다. 난생처음 듣는 크기의 목청이었다. 재현은 두 눈을 꿈뻑였다. 그게..

“참으로 제멋대로이십니다. 다정하게 말하는 것도 멋대로고, 춥냐며 손잡는 것도 멋대로고, 미안하다면서 안는 것도 멋대로고..저 보기 싫다고 나오지 않는 것도 멋대로이니 세자 놀이 잘 하시겠네요.”

재현이 엉거주춤 창발을 걷고 마루에서 내려와 신을 신고 주연에게 가까이 다가가 섰다.

“무서워서 그랬다.”
“뭐가 그리 무서우십니까.”
“환민이도 떠나고, 너도 떠나고...”

주연은 재현과 환민과 궁궐에서 철없이 뛰어다니던 시절을 떠올린다. 참 곱게도 잘생겼지? 술래잡기를 하느라 향원정 기둥 뒤에 숨어서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재현을 훔쳐보던 주연의 등 뒤로 환민이 속삭였다. 그것이 아니라 형님께서 술래시니까... 주연의 두 귀가 붉어졌다. 환민은 답 없이 코를 찡긋했다.


“보고 싶을 것입니다.”

주연이 참았던 문장을 힘겹게 뱉는다. 처소 앞 작은 정원도, 개울도, 따뜻했던 상궁마마들도, 연회날의 즐거움도 다 보고 싶을 테지만 그 중에서도 지금 제 앞에 선 재현이 가장 보고 싶을 것이다.

“나는..”
“......”
“궁에서도 늘 네가 보고 싶었어.”

조금만 걸으면 볼 수 있는데도, 왕자 교육을 받을 때 만나는데도 웃기지... 늘 네가 보고 싶었다. 매분 매초 널 그리워했어. 주연이 다른 이빨보다 조금 큰 제 앞니로 입술을 잘근 잘근 씹었다. 재현이 어떤 마음으로 저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렇게 잘도 마주치던 눈을 오늘따라 피하던 재현이 주연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아직 책봉식이 이뤄지지 않아 엄연히 정의군의 상황인데도 똑바로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서 국본의 태가 났다. 재현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주연의 두 볼을 제 손으로 감쌌다. 비슷한 키에 둘의 시선이 부딪혔다.


“마마! 동궁전에 계시는 겝니까?”

멀리서 김상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재현이 주연의 볼을 놓아주고 한 발 물러섰다.

“야옹-.”

“어..삼색이다.”

지나가던 삼색이를 얼른 품에 안았다. 김상궁. 역시 삼색이가 동궁전에 있었네. 주연이 뒤 돌아 아까까지 짓던 슬픈 얼굴을 감추고 보란듯 삼색이를 들어올린다. 재현은 말 없이 그 모습을 쳐다봤다.


“이제 그만 가셔야 합니다.”
“알겠네.”
“...연아”

목이 메여 앞글자를 잘라먹은 채 재현이 주연을 불렀다. 그게 마치 애칭 따위 같아 주연은 멈칫했다.

“저하. 성군(聖君)이 되어주십시오.”

주연이 허리를 90도로 숙여 고개를 조아렸다. 뒤를 돌아 김상궁을 따라 동궁전을 천천히 나선다. 재현이 한 번은 붙잡아줄까하는 마음에서. 그러나 그는 주연을 잡지 않고 먼발치에서 쳐다만 봤다. 그리고 뒤에서 저를 쳐다보던 재현의 시선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때쯤 주연은 깨닫고 만다. 그동안 재현을 향한 제 마음의 형태가 우애가 아니었음을.







많은 것이 달라졌다. 또 많은 것은 그대로였다. 주연이 궁을 떠난지도 벌써 반년이 지났다. 재현은 연생전 앞을 서성이며 울창한 나무 아래 흐르는 개울을 바라봤다. 주연이 유일하게 남기고 간 것들이다. 재현은 요즘 들어 더 자주 주연의 흔적을 찾았다.

그를 볼 날도 곧이었다.


“책봉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네가 주연이의 집을 찾아가면 궐 안에 어떤 소문이 돌겠느냐. 네가 앉은 자리에 그 아이가 앉을 수도 있었다.”
“하오나 아바마마.”
“주연이에게도 위험한 일이다. 우애가 좋았다는 건 알지만 시간이 좀 지난 뒤에 찾아 가보거라.”


주연의 짐이 모두 옮겨진 이후 바로 찾아가려 했으나 아버지의 반대에 재현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6개월 정도면 소란이 잦아들테니 그때를 기한으로 정했다. 그 사이 재현은 예전보다 웃음이 적어졌고, 말수가 줄었으며, 목소리도 낮아졌다. 어쩐지 분위기가 달라지지 않으셨느냐. 이제 스물셋이시니 그럴만도 하지. 여기저기 쏘다니며 꽤 제멋대로 굴던 재현에게선 제법 어른스러운 태가 났다. 하하 이제 왕위를 물려받으셔도 되겠습니다. 재현에게서 일어난 변화의 원인을 알지 못하는 대비는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주연의 소식은 동궁전에 들어온 후 위에서 새로 붙여준 송내관으로부터 전해 듣고 있었다. 지금까지 재현이 알고 있는 것은 주연이 안 왕후와 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성에서 살고 있다는 것. 밥도 잘 먹고, 잠도 푹 자고 특히 서양에서 들여온 서적을 좋아해 자주 읽고, 밤마다 산책을 나갔다 무예 수련을 한다는 것이었다. 저 없이도 잘 사는 것 같아 옹졸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다. 미리견 과자와 책들을 잔뜩 싸서 가져가야겠어. 주연의 앟 하고 놀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문득 든 생각에 석강(夕講) 중 표정을 숨기느라 혼이 났다. 어느덧 주연을 볼 날도 열흘밖에 남질 않았다.


“저하. 어찌 하루 일찍 가신다는 것입니까.”

강내관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원래 손님이라는게 갑자기 찾아가야 더 반가운 거 아니겠느냐.”
“아휴 그래도요 저하.”
“걱정할 것 없다. 행여 들킨다하면 내가 전부 책임질 것이다. 대신 이 사실은 너와 나만 아는 것이니 내일 저녁 둘이서만 몰래 궁을 나서자구나.”

사실은 주연을 하루빨리 보고 싶어서 그랬음을 강내관은 알까. 그 날 밤 재현은 잠을 설쳤다. 겨우 잠든 후 꿈에는 환민이 또 한 번 나왔다. 이번에도 환민은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고, 당부했다. 주연이를 부탁해. 꼭 지켜줘. 걱정마라 환민아, 내가 잘 지키고 있으니. 지난번 하지 못한 답을 이번엔 했다.







새벽녘이었다.

“당장 문을 열거라.”
“저하 까마득한 축(丑)시입니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느냐? 열라 하지 않느냐!”

중궁전 앞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흰 소복을 입은 중전이 제 눈 앞에 선 아들을 올려다봤다. 붉은 도포에 갓을 쓴 재현의 손에는 보자기에 담긴 미리견 과자와 책들이 있었다. 가파른 호흡에 가슴팍이 들썩이고 있었다.


강내관과 함께 몰래 궁을 나선 게 세시간 전. 송내관이 예전에 알려준 곳을 찾아 재현은 걸음을 재촉했다. 아이고 저하 누구한테 쫓기시라도 하시는 겁니까. 초여름에 가까운 날씨에 비죽 흐르는 땀에 강내관이 소매로 이마를 스윽 닦았다.

“문을 열어보시오.”
“누구..십니까?”
“형님이 왔다고 전해주시오.”
“저희 집에 지금 나으리만한 분을 형님이라고 할만한 분이 없으실텐데요.”

그 집 노비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도련님과 아씨 모두 혼인해 출가하셨는데, 존함이 무엇인지요? 뭔가 잘못됐다. 당황한 강내관의 표정이 읽혔다.

그리고 한시진 넘게 재현과 강내관은 동네 주변 인근을 뒤지며 주연을 찾았다. 세자의 얼굴을 알리 없는 백성들은 짜증스런 얼굴로 그들을 대했고, 어디 직제 높으신 양반분이 술이라도 거하게 취하신 거냐 비웃는 이들도 있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재현의 표정에 강내관은 불안한 얼굴로 손을 모으고 오늘은 이만 들어가시고 내일 송내관에게 지도를 달라 하시지요. 꾸벅였다. 그러나 재현은 직감했다. 이건 송내관이 잘못 알려준 게 아니다. 어마마마가 저를 속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주연은..처음부터 도성에 없었다. 죽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반년간 그애를 지키고 있다고 자신했는데, 제 어미가 저를 갖고 논 것이다. 강내관을 향해 돌아서는 재현의 얼굴에 분노가 깃들었다. 기다랗고 곧게 뻗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당장 중궁전으로 가야겠다.”


그리고 지금 중궁전. 허리를 곧게 펴고 재현이 중전을 노려봤다. 중전은 뻔뻔하게 태평한 얼굴이었다.

“저하. 차림을 보아하니 이 야심한 시각에 궁밖에 다녀오시기라도 하신겝니까.”
“주연이가 있는 곳을 당장 알아야겠습니다.”

중전이 진절머리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송내관에게 거짓을 고하라 하셨습니까?”
“......”
“제가 한가지만 지켜달라 했는데, 그게 그리 어려우셨습니까? 당장 주연이가 있는 곳을 대세요.”
“차라도 한 잔 하시지요.”

쨍그랑ㅡ. 무언가 깨지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소리에 문 앞에 있던 상궁과 내관들이 움찔했다. 중전의 뒤로 쳐진 병풍이 붉게 물들었다. 밑에는 푸른 찻잔이 산산조각 난 채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다. 제 얼굴에 튄 몇 방울의 찻물을 중전이 손바닥으로 닦았다.

“이리 성질을 못 죽이시니 어찌합니까.”
“주연이를 죽이셨습니까?”
“그럴리가요.”
“그럼 지금 어딨단 말입니까!”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헛웃음이 났다. 처음부터 믿지 말았어야 했다.

“대체 왜 이리 백치처럼 구십니까. 수운대군이 도성에 있는 한 언제든 대군을 밀었던 대신과 유생들이 들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시는겁니까?”
“언제는 주연이가 아바마마의 자식이 아니라는 중요한 증거라도 갖고 있다더니 뭐가 두려우셔 그 아이를 그 멀리 내쫓으셨단 말입니까.”
“그건 사실입니다. 다만 이 어미는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지우려는 것입니다.”

마치 가르치는 듯한 어투로 중전이 으름장을 놨다. 저하도 보셔서 잘 아시겠지만 세자의 자리, 왕의 자리는 시대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때라는 것이 있습니다. 혈통보다, 실력보다, 왕이 되겠다는 진실된 마음보다 중요한 것이 흐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라의 망조가 깃들 때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수운대군은.. 더 이상 찾지 않으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중전이 제 앞의 잔에 담긴 차를 들이켰다.

“아뇨. 찾을 겁니다.”

재현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분명 약조하셨습니다. 주연이와 마마를 도성 안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현아.”
“헌데 약조를 깨뜨리셨으니 저도 이제 멋대로 할 겁니다. 어마마께서 손에 쥐어주신 세자 자리로 제가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 똑똑히 보십시오.”

순간 중전의 얼굴에서 불안감이 스쳤다. 저를 등 지고 돌아선 아들에 까득, 중전의 어금니 네개가 갈려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여전히 병풍에는 재현이 내던진 오미자 차가 붉게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려진 황금색 용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하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