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
"형 좀 싸 보이는 것 같아요."
하필 주연이 그렇게 말한 순간 학식에 마가 떴다. 근방 오백 미터 내외에 있는 인간들은 다 들었다는 뜻. 재현은 어벙한 표정으로 집고 있던 소야볶을 떨궜다. 입 앞까지 왔다가 허망하게 바닥행 급행열차 탄 소야볶은 억울했던 건지 이재현의 새삥 청바지에 흔적을 남겼다.
"뭔솔?"
이주연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밥알을 입에 (처)넣다 말고 어깨를 으쓱했다.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이재현은 답지 않게 젓가락도 내려놓고 오래 고민했다. 갑자기 극딜 당할 수 있는 거임? 나도? 일단 입은 옷부터 살폈다. 맨날 그렇듯이 숏패딩 그리고 비니에 청바지 맨투맨. 보세라 옷이 저렴해 보인단 뜻? 냅다 울컥해서 한소리 하고 싶었지만 이주연은 학교 못 오고 줌 수업만 일 년 해 본 신입생답게 얼죽코 차림이라 딱히 지적할 수 없었다.
"아니 뭔데 갑자기."
"뭐가요?"
"왜 갑자기 극딜?"
"극딜 아닌데··· 그냥 그렇다고 한 건데요?"
대화는 미묘하게 틀어지고. 이주연은 더 이상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끝이 찝찝하긴 했지만 자칭타칭 경영쿨남 이재현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분명 그랬는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존나 신경 쓰였다. 맛은 디비지게 없지만 저렴해서 자주 가는 학교 카페 갈 때 누가
"걍 포레(학교 카페: 포레스트)나 가자. 거기가 싸잖아.”
해도 멈칫하고 동기 누가 새 가방 자랑하다가
"별거 아냐. 싼 거 하나 샀어~"
해도 멈칫하고. 그런 나날이 이틀쯤 이어지자 이재현은 거의 신경쇄약에 걸릴 것 같았다.(한번도 안 걸려봐서 그게 진짜 신경쇄약인진 모르겠지만) 동방에서 누가 "아 앰프 개싸구려”라고만 해도 승질을 바락 내기에 이르렀다.
결국 지랄한다고 동방에서 쫓겨나고 자취방서 혼자 소맥 말던 이재현은 이주연에게 충동적으로 전화한다.
"야 쭈연. 진짜 솔직하게 까고 말하자. 먹튀는 니가 했잖아."
代
삼십팔 년 전통의 시대정신은 죽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죽기 직전이다. 하기야 삼대째 내려오고 있는 할머니손순대국밥도 터줏대감처럼 버티고 있던 봉구스밥버거도 문 닫았는데 시대정신 따위야 죽등가. 설령 진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해도 아무도 관심 없을 거다. 재현은 안 그런 것 같아도 시대정신을 사랑했다. 첫 연주도(무대 서 본 적은 없지만) 첫 씨씨도(드럽게 깨졌지만) 첫 씨씨키스도(진짜 첫키스는 아니지만) 개꽐라돼서 필름 끊겨 본 것도 시대정신에서 첨 경험했으니까.
그에 반해 다른 멤버들은 그러려니였다. 코로나 때문에 신입생들이 학교를 안 나올 때도 그러려니. 방역 어쩌고 때문에 동방 폐쇄됐을 때도 그러려니. 심지어 일 년 겨우 버텼더니 또 비대면 수업한대서 일 년 더 기다리게 되었을 때도 그러려니. 그사이 지훈과 성희는 졸업까지 해 버렸다. 그러고 나니 기타리스트도도 없고 베이시스트도 없는 이상한 밴드가 되었다.
졸업을 딱 일 년 남기고 재현은 심란했다. 3.0 찍힌 평균 학점이나 이제 곧 4학년인데 인턴십도 못 하는 거나 1학년 때 노느라 교필 이수 안 해서 까딱하면 졸업 밀리게 생긴 것보다 망하게 생긴 시대정신이 걱정이었다.
대학 밴드라는 게 생각보다 낭만적이지 않다는 건 복학 후에 깨달았다. 2년간 학교축제가 열리지 않으니 설 무대도 없고 꼬드겨 보려 해도 다들 알바니 취준이니 바쁘단 말만 늘어놓았다. 요즘 신입생들은 입학하면서 동시에 1. 이 거지같은 학교 한탕해서 뜬다(졸라 열심히 공부해서 편입한다는 뜻) / 2. 대충 빨리 졸업하고 취업이나 해야지 두 가지 타입으로만 나뉜다는 걸 첨 알았다.
빠진 기타 자리는 소이(보컬인데 기타도 칠 줄 앎)가 채움 되고 민성이야 아직 졸업까지 2년이나 남았으니 괜찮겠지. 빈 베이스 자리야 MR로 어떻게든 채우고. 그런 쓸데없는 생각으로 2시간짜리 교양을 날렸다.
[우리 슈퍼밴드나가까]
중간에 보낸 카톡엔 아무도 답장 안 했다. 읽었단 의미로 말풍선 옆 숫자는 뚝 떨어져 있었는데.
"형 안 가요?"
"야 쭈연." "넌 왜 사냐?"
"····?"
"난 요즘 인간들이 뭘 위해 사는지 몰겠다."
"형이 그런 생각을 해요?"
이주연은 진짜 놀란 듯 평소보다 눈을 두 배 크게 떴다. 이재현은 한 술 더 떴다. "넌 인생에 최종 목표가 뭐냐?" 이주연은 가방 정리하던 것도 잊은 듯 가만 앉아 아주 오래 생각했다. 물론 그사이 이재현은 제 질문의 답이 궁금해지지 않았다.(그리고 애초에 진짜 궁금하던 것도 아니고.)
"없으면 나랑 같이 하나 세우자."
"······뭐요?"
미묘한 떨림. 평소 재현 같았음 절대 놓치지 않았을 싸인이었지만 그날따라 이재현은 자기만의 세계에 푹 갇혀 있었고(이주연마냥) 그 탓에 너무 무심하게 답했다.
"슈퍼밴드 출연?"
精
이주연은 제법 흔쾌했다. 주연의 조건은 딱 두 가지였는데.
1. 포지션은 무조건 드럼
2. 크리스마스 같이 보내기
문제는 둘 다 별로 소박한 조건은 아니란 것이었다. 1번은 이재현과 겹치는 포지션이었고 2번은 이재현 여친 정소정이 알면 뒷목 잡고 쓰러질 일이었다. 그러나 이재현은 5초도 고민 안 하고 끄덕였다. 재현이 원하던 주연의 포지션은 베이시스트였으나(손이 커서 5현 베이스도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연은 드럼만을 고집했다. 아 그리고 조건 하나 더.
"형이 가르쳐 주세요."
씨빠 그정도야 당연이 해 줄 수 있지 맘먹으면 연락 다오.의 마음으로 이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주연은 제법 열성적이라 둘은 다음 수업(무려 전필)도 까먹고 동방으로 향했다. 재현은 자기도 잘 못 치면서 성심성의껏 주연을 가르쳤다. 어어 기본 자세는 이렇게 야 허리 좀 펴라 글구 손 모양은 아니 그거 아니고 이렇게 줘봐 형이 해줄게. 약 세 시간의 강의 끝에 주연은 아주 어설프지만 태는 좀 났다. 이재현은 아주 만족스러워져 남은 수업 다 제끼고 이주연과 학교 앞 옛날통닭 가게 가서 맥주를 삼천씨씨나 마셨다.
문제는 크리스마스. 성실한 남친 이재현은 모든 기념일을 여친과 함께 보냈고 크리스마스는 커플 대명절 중 하나였다.
"나 이번 크리스마스는 주연이랑 보내야 될 거 같애."
카페에 마주앉아 기말 대체 리포트 조지던 와중 불쑥 말했다. 아니 사실 통보했다. 이재현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소정 양은 "주연이는 또 언년인데?" 라고 분개한 채 말하다 컵을 치는 바람에 노트북에 커피를 와장창 쏟았다. 다행히 뻑나진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야마가 돈 소정 양은
"그럼 헤어지든가!" 빽 소리 치고 카페를 나가 버렸다. 젖은 노트북을 소중하게 든 채로.
그런 고로 이재현은 종강 일주일 그리고 크리스마스 열흘을 앞두고 차였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오빠내가미안해]라고 문자가 오긴 했지만 못 본 척했다. 이미 그날 그 사건으로 좀 기분이 상해서.
전여친이 된 소정 양이 문자를 다섯 통쯤 보냈을 때 재현은 주연과 드럼 연습을 네 번 더 하고 시대정신 멤버들에게도 주연을 소개해 주기 일보직전이었다. 베이스 연습을 위해 베이시스트 유튜버들도 구독해 놨다. 악기 빌리려 성희에게 오랜만에 전화도 걸었다. 누나 잘 지내죠 저 담달에 베이스 좀 빌려주심 안 돼요? 성희는 시대정신이 아직 망하지 않닸단 사실에 놀란 기색이었지만 티 내지 않고 흔쾌히 허락했다.
대망의 크리스마스. 재현은 소정 양과 가기 위해 예약해 둔 식당(다행히 이재현 이름으로 해 둬서 소정 양이 보복취소를 하는 일은 없었다.) 앞에서 이주연과 만났다. 크리스마스에 남자 둘이 만나는데 차려입기도 뭐해서 평소 같은 적당히 후줄근한 차림이었다. 물론 이주연은 평소보다 더 차려입었다. 쭈연 너 나랑 헤어지고 나서 데이트 가냐? 이재현이 장난스럽게 물었지만 이주연은 웃기만 했다.
"형은요?"
"엉?"
"데이트 안 가요? 옷이···"
"얌마. 나 그래도 신경 쓴 거거등."
말은 그렇게 했어도 좀 찔렸다. 아무래도 이 거리에서 이재현 착장이 젤 후리했으니까. 이주연은 작게 웃고 다시 물었다. 데이트 안 가요? 별로 답하고 싶지 않았으나 숨길 것도 아니었다. 이재현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헤어졌는데."
"왜요?"
"너랑 오늘 만나겠다니까 헤어지자고 해서 걍···"
말하다 말고 이재현은 멎었다. 이상한 대화네. 왠진 모르지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이주연은 그 뒤론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말없이 따라 걷기만 했다.
세미-레스토랑은 재현 취향은 아니었고 주연 취향은 맞았다. 쥐꼬리만큼 나오는 스테이크와 꾸덕한 파스타를 가운데 두고 둘은 쓸데없는 얘길 나누었다. 대화는 썩··· 아다리가 맞진 않았지만 꾸준히 이어졌다. 이재현이 아졸라춥다 하면 이주연은 추운 날씨 좋아요 살아 있는 느낌이 들어서요 답하고 이재현이 넌 무슨 밴드 좋아해? 물으면 이주연은 전 빌리 아일리시 좋아하는데요 답하고. 넌 드럼 왜 치고 싶어? 물었을 땐
"형 우리 엄마 첫사랑 닮았어요."
뜬금없는 답이 왔다. 엥? 어머니 뭐라고? 머쓱해진 이재현이 못 들은 척했다. 이주연은 다시 한 번, 더 명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형. 우리 엄마 첫사랑 닮았어요.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주연은 시내 광장에 세워진 트리 앞에서 사진 찍길 원했고 재현은 그걸 위해 줄까지 섰다. 사 분쯤 섰을 땐 영하 십오도 날씨에 코트만 입은 주연이 걱정됐다.
"잠만 있어 봐."
그렇게 말하고 이재현은 길 건너 노점상으로 호다닥 달려갔다. 원쁠러스원이라는 스마트폰 터치 장갑을 만 원 주고 샀다. 다시 길을 건너 주연에게 돌아갔을 때도 줄은 하나도 안 줄어 있었다.
"선물."
봉다리에 오천 원 스티커가 붙은 장갑을 주연은 한참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저거 오천원이면 원쁠원이 아니고 걍 정가에 두 개 산 거 아냐? 아깐 가격표 볼 정신도 없어서 몰랐는데 좀 사기 당한 기분이었다. 이재현이 투덜거리려던 찰나.
"고마워요."
이주연은 웃었다. 환하게. 코는 시뻘개지고 귀도 터질 것처럼 빨갛고 볼에도 홍조가 올라 있어 불쌍해 보이는 얼굴로. 어··· 그려··· 이재현은 아주 찝찝하게 답했다. 주연은 고맙다던 사람답잖게 장갑을 코트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이재현만 봉다리 벅벅 뜯어서 장갑을 꼈다. 끼고 보니 너무 촌스러운 디자인이라 좀 신경 쓰였다.
神
거기까진 좋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카페고 술집이고 죄다 만석이라 둘은 이주연 자취방으로 향했다. 크리스마스니까 케이크는 먹어야겠지 않겠냔 주연 의견에 뚜레쥬르에서 남은 케이크 암거나 집어 든 꼴로. 이주연은 또 '크리스마스니까'라는 이유를 붙여 와인을 고집했다. 자취방 앞 편의점에서 제일 싼 와인을 투쁠원으로 사고 대충 안주거리 할 만한 과자도 샀다.
알고 지낸 지 일 년이 다 됐지만 주연 자취방은 첨이었다. 동기들 한번 들이면 공동 주택 된다는 재현의 충고를 뼈에 새긴 거랬다. 자취촌에서 처음 걷는 골목. 처음 가 보는 누군가의 자취방. 것도 크리스마스에. 공동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이주연 등짝을 보며 이재현은 괜히 긴장했다.
생각해 보면 진짜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긴장은 왜 했지.
첨 가 본 주연의 자취방은 자취방 치고 넓었고, 묘하게 깨끗하고 묘하게 지저분했다. 엄청나게 지저분한 건 아닌데 또 잡동사니가 너무 많아서 여유 있는 공간이랄 게 없어 보였다. 1.5룸이라 거실과 침실이 구분되어 있는 건 좋아 보였다. 둘은 좀 덜 복잡한 침실에 접이식 테이블을 펴고 앉았다. 티브이도 침실에 있어 분데스리가 경기를 켜 놓고 와인 두어 잔 마셨다. 어딘가 불편한 듯 자꾸 자세를 뒤척이던 주연은 땀을 흘린 게 찝찝해 씻고 싶다며 화장실로 휑 가 버렸다. 아직 추위가 덜 가셔 볼따구가 시뻘건 주제에 암튼 그렇게 말했다.
자꾸 쭈그러드는 자신이 싫어 이재현은 목구멍 열고 와인을 쏟아 부었다. 화장실 들어간 이주연이 한참이나 나오질 않아 혼자 거의 한 병을 다 비운 참이었다.
심판이 추가 시간 5분 선언을 했을 때 드뎌 이주연이 나왔다. 머리카락은 반만 마른 채 주연은 아주 결연한 표정으로 침실로 걸어왔다. 덜 마른 채 아까 입고 있던 얇은 니트를 다시 입고 나온 탓에 옷이 몸에 착 붙어 있었다. 널따란 어깨선 따라 급격하게 좁아지는 허리 같은 게 노골적이었다.
"때 밀고 왔냐? 왜케 오래 걸···"
최대한 장난스럽게 말하려던 이재현 뒷말은 나오질 못했다. 이주연이 갑자기 키스해 오는 통에.
execution
종강 이후, 정확히는 크리스마스 이후 이주연은 연락을 뚝 끊었다. 시대정신 멤버들에게 주연을 소개해 주는 것도 어영부영 무산됐다. 그리고 돌아온 3월. 이주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재현 옆자리에 앉아서
"같은 강의 듣네요?"
말을 붙여 왔다. 이재현은 좀 황당했지만 어어 그렇네 하고 말았다. 괜히 의식하는 거 티 내면 지는 기분이었다.
-제가 뭘요.
그렇지만 이 순간 이재현은 인정하기로 한다. 진 거 맞네. 태연한 이주연 대답을 듣고 있자니 잔혹한 현실을 마주하는 기분이다.
"연락 안 한 것도 너고 밴드 안 나온 것도 너잖아. 다 가르쳐 놨더니···"
개구린 멘트. 알면서도 주절거리는 주둥이는 멈출 생각을 않는 듯 닫히지 않았다. 너 때문에 드럼자리 비워놓고 기다렸더니 오지도 않고 어쩌고 시대정신 애들한테 니 얘기 다 해 놨는데 어쩌고. 수화기 너머 주연은 아무 말도 없다.
-형.
"······"
-형이 뭘 가르쳤어. 형 드럼 실력 개구려요.
"뭐? 자세도 몰랐던 게···"
-솔직히 형 자세도 별로? 그리고 형 저번에 기본이라고 알려 줬던 것도 박자 다 놓쳤잖아요.
"니도 다 놓쳤거든?"
울컥해서 반박하자마자 재현은 후회한다. 아씨 이딴 소리 하려고 전화한 게 아닌데. 전 첨이었고요. 형은 그따위로 할 거면 밴드 왜 함? 주연도 만만찮게 유치하게 공격했지만 재현은 입 닫고 있는 걸 택한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주연의 한숨 소리가 이어진다.
-시비 걸려고 전화했어요? 끊어요.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야, 주연,"
-아, 맞다. 그리고 있죠.
"·······"
-형 우리 엄마 첫사랑 1도 안 닮음. 제가 눈이 삐었었나 봐요.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전화해야 돼서 끊어요. 수고요.
주연은 저 할 말만 마치고 전화를 뚝 끊었다. 재현은 부글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려 심호흡했다. 하지만 자꾸 울컥하고 뭔가 치미는 기분이라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목적지는 뻔하다면 뻔한 곳. 한 번 와 봤지만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는 곳. 이재현은 공동현관에서 세 번이나 302호를 호출했지만 까였다. 누가 이기나 보자 싶은 마음으로 한 번 더 호출하려던 때 안쪽에서 쓰봉 든 여자가 나왔다. 재현을 좀 수상하다는 듯 봤지만 수상한 짓 할 와꾸는 아닌 걸 보고 쿨하게 가던 길 갔다.
공동현관 패스한 재현은 엘리베이터도 안 타고 곧장 3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302호 문을 쾅. 쾅쾅.
"야 안에 있는 거 다 알거등?"
친 것 치고는 좀 소심하게 속삭였다. 생각보다 복도에 소리가 너무 울리더라. 노선을 틀어 이주연에게 전화 테러를 날리기로 했다. 다섯 번쯤 전화를 걸고 복도 센서등이 두 번 점멸했다.
그리고 현관문이 열렸다.
주연은 크리스마스날 찬바람 잔뜩 맞았던 얼굴이었다. 볼도 코도 귀도 시뻘개진 얼굴. 한바탕 쏟아부으려던 이재현은 암것도 못 하고 그대로 굳었다. 얘 혹시 울었나?
"시끄러우니까 들어와요."
확인사살하듯 말하는 목소리까지 맹맹하다. 이재현은 쭈뼛거리며 고장 난 듯 발걸음을 옮겼다. 혼자 마시던 건지 거실에 맥주캔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어쩐지 전세가 역전되었다. 주연은 다시 거실 바닥에 철푸덕 앉아 맥주캔을 들었다. 멀뚱하게 서 있던 이재현은 조심스럽게 그 옆에 가 앉았다.
"조건 바꿀래요."
"무, 뭔···"
"밴드요. 아무래도 그걸론 부족한 거 같아요."
형 드럼도 너무 못 치고··· 주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쪼끔 열받았지만 죄인이 된 재현은 잠자코 주연의 조건을 기다렸다.
"형이랑 사귈래요."
"머, 머?"
"형이랑 사귀고 싶어요. 기간은 내가 헤어지자고 할 때까지."
죽느냐 사느냐. 햄릿도 고민하던 그 갈림길에서 이젠 이재현이 고민한다. 시대정신, 죽느냐 사느냐. 순간적으로 눈앞에 집에 고이 모셔 둔 성희의 베이스부터 시작해 시대정신에서의 모든 일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영원 같은 일 초 이 초 삼 초가 흐르고.
이재현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