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크리스마스에 2,3)동전 두개를 던져 모두 앞면이 나올 확률
= 1/365 * 1/2 * 1/2
누군가 재현에게 문자가 좋으냐, 전화가 좋으냐 꽉 막힌 무슨무슨 테스트와 같은 이분법의 질문을 한다면 재현은 생활에 널려있는 연락들을 떠올릴 테고, 그들의 평균값을 추리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것들에 좀 더 치우칠 것이다.
마침 교문 앞 무슨무슨 동아리의 무슨무슨 설문조사에 잡혀 문자에 한 스티커 행사하던 참이었다. 반지름 삼미리의 파란 원형 스티커를 [문자] 아래에 붙이는 데에는 단 5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 뒤로 줄 지어있는 여름vs겨울, 물냉vs비냉, 피자vs치킨, 외향vs내향 등 의 판넬들도 막힘없이 통과해나갔다(여느 사람들이 그렇듯이). 마지막 판넬 앞에 선 설문조사 무리 중 한명이 사람 좋게 웃어보이며 재현을 반겼다.
"선택에 거침이 없으시네요~ 인상 깊습니다. 아이구 또 상당히 잘 생기시고."
"아, 네."
"다른 분들보다 훨씬 빨리 설문을 진행하셨어요. 의견이 확고하신 타입인가봐요. 기면 기고 아닌 건 아닌 타입?"
"네 맞아요."
"이쪽으로 다니시는 거 보면, 사회대 다니시나요?"
"아뇨. 공대 다닙니다."
마지막 판넬은 그리 간단한 단어로 이루어지지 않아보였다. 재현의 손가락에 끝에 붙은 스티커의 접착력이 힘을 잃고 있었다. 넉살 좋아보이는 재현 앞의 이는 판넬 앞에서 비키질 않았다.
"오우, 의외시네요. 딱 뭐랄까…. 사회복지과. 이런 쪽이신데. 심리상담과 더불어 사람들과 어울리시고. 봉사도 좀 다니시고."
"처음 듣는 소리네요ㅎㅎ"
"많이 들으셨을 것 같은데~, 네. 지금까진 선택을 위한 워밍업 뭐 그런 거였구요. 저희 동아리의 핵심 설문은 이건데요, 한 번 읽어보시고 신중히 선택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아,네."
"자신의 소신을 담아서 신~중히."
Q7. [자신의 가치와 더 가까운 것은? 세계평화 vs 주변 공동체의 안위]
"역시, 좀 어려우시죠. 약간 내면에서의 불일치 부조화 불균형이 느껴지실 수 있어요."
"… 예, 수고하십니다."
재현은 곧바로 돌아섰다. 어렵기는 개뿔이. 답은 진작에 나왔다. 신천지의 포교활동을 금방 눈치채지 못했다니. 동아리 집부의 설움을 알아 기꺼이 응해주었더니, 에라이. 재현은 혀만 쯧, 한번 차고 말뿐 괜한 땅을 찬다거나 분풀이를 하지는 않았다. 포교활동의 일환이자 형식적 인사말에 귀기울인 제 자신이 조금 웃겨 고개를 한번 털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니까. 제 단순함을 아는 재현은 한발짝 더 떼는 순간 신천지 무리를 잊었다. 지금은 좀 둔해지는 계절이니 몸이 제 갈 길 가는대로 정신도 고대로 묶어놔야했다. 정신이 이리저리 이동거리를 늘리면 에너지적 소모다.
그래서 입 닫고 뇌 닫고 긴 다리 뻗어대며 목적지까지 가는 중이었다. 패딩주머니 속 손바닥 안에서 지잉- 진동이 울린다. 짧게 울리고 마는 단발의 진동음.
문자.
아니 카톡.
누구냐?
- 형.
재현은 이런 부류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용건 있어 카톡하면서 부르기만 띡 불러놓고 기다리는 이들. 하다 못해 '뭐해?' 라도 덧붙이든지 아님 단도직입적으로 본론부터 들이밀든지. 이러면 본론으로 들어가기까지 몇단계를 더 거쳐야했다. 보통 저런 타입의 인간들은 좀 느긋한 편이고 재현은 다소 귀찮은 걸 싫어하며 급한 성격이라 할 수 있겠다. 근데 재현의 주변에는 저런 타입의 인간들이 흔하지 않았다. 한… 50명 중 한 명 정도? 나머지는 49에 해당하는 이들은 끼리끼리라는 말이 맞는지 대개 성격이 급했다. 척하면 척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런 경우는 재현에게 있어서 소수의 상황(대략 2퍼센트)이고, 예외라 쳐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 왜?
재현은 우회없이 또 거침없이 몇단계를 거쳐야했다.
- 잘 지내요?
- 엉. 너는? 왜?
- 저도 잘 지내요.
- 다행ㅋㅋ 근데 왜?
- 학교는요?
- 종강했지
- 그렇구나
- (멋쟁이 선글라스 이모티콘)
- 요즘 날씨 진짜 안춥지 않아요?
- (사진)
- 오 빙판길
- 춥다 ㅎㅎ 그래서 왜
- 신발예쁘다ㅎㅎ
- 그치 새로 하나 샀다
- 저도 저런 신발 하나 살까봐요
- 이거 구하기 어렵다 ㅋㅋ
- 곧 크리스마스잖아요
이게 본론이구나? 몇단계에 거쳐 얻어낸 것 치고는 꽤나 포괄적이었다. 재현은 한쪽 입꼬리를 슬 올리더니 손가락을 움직였다.
- 그러게 크리스마|
커서가 깜빡깜빡. 백스페이스를 도도도도도도도독. 손가락을 몇 번 더 놀리더니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댄다. 수신자는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고 응답을 한다.
'네 형.'
"엉 주연아."
'네.'
"ㅋㅋ크리스마스 왜."
'아… 형 별일 없어요?'
"그럴지도? 왜? 노까?"
'아뇨 형 그때 이브에'
"엉냐"
'김장한대요.'
..어 그래. 어그레씨브랄. 네? 아냐. 그럼 그때 봐요. 엉냐. 전화는 싱겁게 끊겼다. 재현은 떫게 입을 앙다물고 다시 휴대폰 쥔 손을 주머니 속으로 처박았다. 어쨌든 12월 24일 주연과 보기는 본다. 젓갈 냄새 가득한 재현의 외갓집에서 배추 나르고 김치통 나르겠지만. 아 김장 왜케 늦게 하냐..
작년에는 뭘 했더라, 크리스마스에. 작년엔 군대 막 전역하고 난 후라 동기들과 놀기에 바빴다. 실은 크리스마스라는 자각도 없었다. 어렸을 적 머리맡에 선물이 놓여있을 때나 목 빼놓고 기다렸지 재현에게 크리스마스는 365일 중 보통의 하루였다. 커갈수록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퇴색되어가는 것은 분명했다.
야, 내일 크리스마슨데 뭐하냐? 몰라 여친 없다고 놀리냐? 동기들이 주고받는 대화에 이재현은 굳이 안해도 될 말을 덧붙였다. 크리스마스가 원래 애인이랑 노는 날이냐? 재현은 별 생각 없이 물은 건데 시비조로 들렸는지 이새끼 뭐네뭐네 욕을 얻어먹고 끌려갔다. 욕은 얻어먹었더라도 주변 사람들 들떠있는게 보기 좋기는 했다. 거기에 장단을 맞춰주는 것은 쉬웠다. 후문 앞 아저씨들만 가는 치킨호프에서 맥주잔을 짠짠 부딪혔다. 잔뜩 열이 오른 동기들이 자기들끼리 꽁트를 찍어대며 조잡한 소음으로 주황빛 가게를 채웠다.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교수 얘기하고 씨씨 얘기하고, 이럴거면 내일 모레 만나도 됐을 것을. 재현의 생각과 별반 다를 것 없이 명목은 희미해진다. 귀엽고 징그러운 것들. 재현은 익숙함에 적당히 웃으며 조잡함을 웅웅히 차단하고 있었다. 웃음소리가 뭉개지고 웃는 낯들은 그나마 만족스럽고, 적당한 웅웅함에 사로잡혀 있을 때, 재현의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지잉 울렸다.
단발의 진동음.
주연
메리 크리스마스ㅎ 오후 11:41
문자를 읽은 재현은 온몸을 오소소 타고 오르는 감정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몰랐다. 감동? 비슷한 것 같았다. 깔려있는지도 몰랐던 흔한 캐롤 bgm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치킨호프의 커다란 빔스크린에선 산타가 굴뚝을 타고 들어가고 있었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하이얀 함박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다 커버린 재현은 크리스마스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근데 올해는 감동이 없네.
재현은 시린 코를 패딩 안쪽으로 묻었다. 그 후로부터 내내 생각해왔다. 몇개월은 두루뭉술 감싸고 있는 것들을 걷어내야했고 또 몇개월은 이런 거 저런 거 다 따져봐야했다. 이를 테면 서울과 하동의 거리, 직장인과 농부, 외할머니와 이웃집, 이상과 현실 같은 것들 말이다.
사실 재현은 좀 많은 것들을 신경 쓰는 편이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게 아니었다. 이분법적 사고를 오히려 비판했던 때도 있었다. 그의 사고베이스에 정립된 것은 단지 옳고 그름의 기준뿐이었다. 재현은 상황의 몸통만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부속된 것에도 똑같은 에너지를 쏟았다. 헛일도 참 많이 했다. 득과 실의 효율을, 숫자를 먼저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거다. 남들은 속모르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때에 맞춰 발동하는 단순함에 기대어 살아 괜찮은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게 살다보니 피곤했다. 기피하던 이분법적 사고가 효율적으로 보였다. 그에 따르면 지난 수개월, 아니 수년간 이재현을 괴롭히던 고민은 간단히 갈래진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 이거 아님 저거. 그래도 고민된다면 좋을 쪽으로.
내가 너무 어렵게 생각했나?
이분법적 사고에 끌려오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종국엔 이거 아님 저거였다. 그걸 이제야 깨달은 이재현은 탄식한다. 그리고 한순간 결심한다.
결정을 해야 했다. 그게 뭐든 간에.
1) 이번 크리스마스에 2) 주연과 3) 재현이.
열심히 뻗어대던 다리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버스 정류장에 붙은 디스플레이 속 88번은 <차량정보없음> 의 정보값을 달고 있다. 아… 방금 떠나갔다는 소리다. 시간 널널 했었는데.
지잉-
다시 한번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한다. 이제는 2%와 98%에 해당하던 것들은 이름을 달리한다. 주연이 아니면 다른 것들.
[NIKE - THE DRAW 당첨 안내]
그래. 좋을 쪽으로. 마침 주연과 저의 발사이즈가 비슷했다.
확률확률확률
1) 이번 크리스마스에
24일 새벽부터 다섯시간을 달려 아침 일찍 외갓집에, 무탈히 도착했다. 이미 사건은 벌어졌으니 확률은 확정된다. 1의 값을 갖는다.
2) 주연과
외갓집에 도착하자마자 주연과 제대로 인사할 시간도 없었다. 오자마자 마당에선 물 빼놓은 배추들이 재현을 반겼다. 패딩을 벗지도 못하고 소쿠리째 배추들을 안으로 날랐다. 주연은 얇은 티셔츠 한장만 입고 창고에서 액젓을 가져오는 중이었다. 안춥냐? 물어볼 새도 없이 이번엔 포터로 실어온 총각무들을 날라야했다. 패딩에 짠기와 흙이 그대로들 묻었다.
부재료들 몇십단씩 들어간 대형 고무통에 젓갈 콸콸 때려 넣고 이집 저집에서 가져온 고춧가루들도 몇키로나 풀어넣어 대형나무주걱(진짜 1m 크기다)으로 잘 섞어줘야 했다. 동네 김장은 정말 빡셌다. 입 앙다물고 주걱으로 휘적휘적 젓는 재현의 등 어깨 엉덩이 등등을 동네 어르신들이 지나가며 톡톡 쳐주셨다. 군대 갔다오드니 훤칠해졌네. 야가 미경이 아 맞나? 고생 좀 해라. 예 안녕하세요, 네 맞습니다. 주걱을 놓지 않으며 성실히 대답했다. 대형 고무통을 꽉 채운 되직한 양념 덩어리를 휘젓기. 삽으로 눈 푸는 것보다 힘든 것 같았다.
또 누가 어깨를 툭툭 쳤다.
예?
열중했던 얼굴을 띨히 들어보이자 눈 앞엔 주연이 있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라가 웃고 있는듯했다. 힘쓰느라 들이켰던 숨이 입 새로 털털 나왔다. 반가움에 숨길 수 없는 웃음과 같았다.
"야 주연."
"이거 하고 해요."
주연이 손바닥 부분이 빨간 목장갑을 내밀었다. 주걱이 너무 투박해요. 그렇게 덧붙였다. 장갑을 받아 들어 착용한 재현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주연은 또 없었다. 동네 어른들은 주연의 이름을 계속 불렀고 주연은 불려지는 대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주연과 단둘이 있게 될 수 있게 된 건 늦은 오후였다. 김치통 어르신들 집마다 모두 날라드리고, 어르신들이 주시는 술 몇잔 받아마시고 난 후였다. 여전히 어른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는 외갓집에서 나와 바로 옆집으로 들어갔다. 주연의 집이었다. 시골집답게 잠겨있지 않은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주춤주춤 벗으며 주연, 하고 불렀다. 그러자 화장실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김이 뭉게뭉게 피어나왔다. 그리고 주연이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나왔다. 어 형. 그다지 크지 않은 주연의 집이었기에 훈기는 재현의 낯에도 쉽게 닿았다.
"왜 씻었어?"
"원래 자주 씻어요."
"너희 할머니는 아직 울집에 계신다."
"네. 거실은 추운데.. 들어와요."
재현이 어둑한 거실 한가운데에 엉거주춤 앉자 주연은 제 방문을 열었다.
주연은 재현네 외갓집 옆집 할머니의 손주였다. 어렸을 적부터 재현이 할머니집을 찾을 때면 주연과 자주 놀았다. 중학교 시절엔 아예 여름방학을 이 곳에서 지낸 적도 있었다. 그렇게 해를 거쳐가며 재현이 점차 깨달을 수 밖에 없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주연이 재현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꽤나 오랫동안. 주연은 저보다 작은 재현을 너무도 잘 따랐다. 재현이형, 재현이형 징그럽게 부르고 따라다녔다. 집에 하나밖에 없는 죽부인을 재현에게 양보하는 대담함까지 보였다. 주연은 자는 재현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기도 했고 접혀있는 재현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펴서 손을 잡아보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재현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는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착각이다,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날 재현은 제 안면에 끼쳐오는 주연의 작은 숨을 잊을 수 없었다. 이는 어쩔 수 없이 재현을 혼란스럽게 했고, 고등학교 2학년 3학년에 올라서는 외갓집에 가질 않았다. 성인이 된 해의 설날에야 외갓집을 다시 찾게 되었고 그때 다시 주연의 얼굴을 봤을 때는. '형 어른됐네요.' 라며 쭈뼛대는 낯을 봤을 때는.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주연은 이 곳에 살았고, 이 곳에 올 때마다 떠오를 것이었다. 형 옆에서 자도 되냐는 아직 어리다면 어린 주연을 내치지도 않았다. 자는 재현의 얼굴에 따끔따끔 내리는 눈빛이 여실했는데도 말이다.
오늘의 주연도 참 오랜만에 보는 거였다. 함께 잠들곤 했던 이부자리 사이를 꾸물꾸물 파고들어 앉았다. 시골집 특유의 뜨끈뜨끈한 방바닥이 열기를 뿜어댔다. 주연도 그 옆에 앉았다. 재현은 피곤하다는 듯 앓는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펴 어색함을 지우려했다.
"잘 지냈어?"
"네. 형은요?"
"나도. 농사는 안힘드냐?"
"뭐… 할머니께서 좀 힘들어하시지 저는 괜찮아요."
"그러고보니 겨울에 뭐해? 겨울엔 할 거 없잖아."
주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농막도 좀 정비하고요…, 시장도 가고. 아. 주연은 살짝 웃는듯했다. 재현은 시간이 괜찮다면 서울에서 잠시 지내는 건 어떻겠냐, 물어볼 참이었지만
"봉사활동도 다녀요."
"봉사?"
"네. 차타고 5분이면 가는 요양원이요. 거기서 순이할머니 목욕봉사 나올 때 저를 스카웃했어요."
"…좋은 일이네. 나도 고딩 때 6박 7일로 요양원 봉사 다녀온 적 있기는 한데."
재현은 고등학생 때 이야기를 하며 잠시 멈칫했다. 고딩 때 부러 주연을 피한 걸 생각할 때면 스스로 거북해졌다. 도둑이 제 발 저린 셈이다. 그러나 주연은 재현의 주춤거림을 캐치하지 못했는지 그러거나 말거나 제 말을 이어갔다.
"어, 형처럼 봉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있나봐요. 제가 다니는 요양원에도 거기서 묵으면서 봉사를 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이미 오래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반기마다 오신대요."
"엉.. 봉사가 직업이신가보다."
"그런 직업에는 뭐가 있죠?"
"……사회복지사?"
"아, 사회복지사…. 멋지다."
"주연아."
"네?"
"어떤 사람들이 나보고 사회복지과 같다 했는데."
"어떤 사람들이요?"
신천지. 라고 답할 순 없으니… 그 있어어.. 얼버무리며 뜨끈한 바닥에 꾸물꾸물 누워버렸다. 그러자 주연도 머리를 마저 탈탈 털더니 엎드려 팔을 베고 누웠다. 재현은 고개를 주연 쪽으로 슬며시 돌렸다. 엎드려 누운 주연의 입은 팔뚝에 묻혀있었고 고요한 두 눈은 내리깔아져 있었다. 멍때리는 건 아니었는지 눈을 몇번 깜빡이기도 했다. 어딘가 골똘해 보였다. 올해로 성인이 된 주연의 얼굴에 그 시절의 앳됨은 남아있지않았다. 원래도 존재감 강했던 골격이 좀 더 다부져졌고 얼굴선은 모난 데 없이 진해졌다. 골똘한 옆얼굴 속 유려히 길을 낸 광대를 한번 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곧바로 손을 내어 엄지로 쓸어보았다. 주연이 움츠리며 그제야 재현을 봤다.
"너 나 어색해?"
"…쫌?"
"왜?"
"그냥요."
이거 아닌가? 주연의 반응이 낯설었다. 언제는.. 지는 나 잘 때 잘만 만져놓고. 주연은 다시 얼굴을 돌렸다. 재현만이 주연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기도 흘렀고, 주연의 마음이 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껏 전제는 '주연이 재현을 좋아한다.' 였는데. 이미 확률 1로 점찍어두었던 것이란 말이다. 재현은 제 마음만 방향을 정하면 된다 생각했었다. 주연의 마음 또한 갈래진다. 재현을 좋아한다, 아니다. 확률은 이분의 일이었다.
3) 재현이
"교회?"
"네.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뽑기로 선물 준대요. 같이 가봐요."
저녁밥을 먹은 후였다. 바깥이 깜깜해지자 주연은 몸을 일으키고 재현을 내려다보며 교회에 가자, 그랬다.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재현은 입을 다물었다. 주연은 이미 가기로 마음 먹은듯한 모양새의 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간다는 녀석 옷차림새가 맨투맨 한장이라 세워두고 잔소리를 좀 했다. 안된다. 동상 걸린다. 실제로 우리 작은 아빠는 한겨울에 옷 한장만 입고 일하다 손가락이 어셨다. 주연의 행거를 뒤지며 그렇게 말했더니 뒷편의 주연에게선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왜. 형이 오바하는 거 같냐?
"아뇨, 저도 일하다 동상직전까지 간 적 있어요."
"야이씨 진짜? 어디봐봐."
"지금은 괜찮은데…"
주연의 손가락 말단은 거칠거칠 갈라져있었다. 재현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왜냐면 재현 또한 핸드크림 같은 거 바르지 않으니까. 제 손 끝으로 거칠한 다른 손 끝만 연신 문지를 뿐이었다. '어떡하지.'라는 생각만이 재현의 머릿속을 채울 때 주연은 다시 재현을 불렀다.
"저 진짜 괜찮아요. 농사꾼한테 예삿일인데.."
재현은 마음이 울렁거렸다. 어휴.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다시 행거로 손을 뻗어 패딩을 집었다. 야 이거 좋은 거 있네. 왜 안입냐 주연야. 주연은 말없이 재현이 건네는 패딩을 받아입었다. 입은 꼴이 폭닥하니 괜찮아보였는데 애가 목이 길어서 그런지 휑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재현은 제 목도리를 빙빙 감아주었다. 눈을 깜빡깜빡 거리며 목을 가만 내어주는 주연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이거 너 해라."
"우와."
"하고 다닐거지?"
"네. 크리스마스 선물 같다.."
"…그래 가자."
좁은 주연네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재현은 생각했다. 차 트렁크에 있는 진짜 크리스마스 선물을. 지금 줘야 할까? 생각도 잠시 했지만 주연이 현관을 나서는 대로 따랐다. 원래 계획대로. 잠자는 주연의 머리맡에 놓고, 그 얼굴을 구경하자. 들뜨는 마음을 조금 눌렀다.
와! 형, 예쁘죠.
30분간 깜깜한 길을 걸어 도착한 교회는 정말 자그마했다. 교회 앞에는 그나마 큰 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엔 작은 빛전구들이 엉성하게 걸쳐있었다. Merry Christmas. 얹혀진 네온 사인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주연은 노란 불빛에 취한듯 이리보고 저리보고 했다. 예쁘긴 예뻤으나 이럴 줄 알았으면 김장이 끝나자마자 주연을 서울로 데려갈 걸 그랬다. 아니면 하다못해 주변 도시의 시내에라도. 이런 건 서울에서 예삿일인데… 주연의 대사를 혼자 씹었다. 구경을 다했는지 주연은 다시 재현의 옆에 와서 섰다. 그리고 말한다. 형, 이거 제가 설치했어요.
크리스마스니까 예쁜 거 보여주고 싶었어요.
주연의 노란 빛들로 어룽진 눈동자가 재현을 본다. 그 순간 결정되는 것이 있다.
3) 재현의 동전
이거 아님 저거. 여지껏 갈래의 시작에 서 있던 재현은 방향을 꺾어 한발을 내딛는다. 그러자 여태껏 쌓아왔던 포인트들은 유효해진다. 다른 갈래로 들어갔다면 무효화되는 것들. 포인트들은 재현의 가속도가 된다. 주연이 서 있을 언저리까지 힘껏 민다.
1)크리스마스에 2,3)동전 두개를 던져 모두 앞면이 나올 확률
= 1 * 1/2 * 1
어렸을 적 교회에서 선물준다고, 맛있는 과자파티를 준다해도 따라가지 않았던 교회이다. 재현은 예배순서 같은 거나, 기도방법도 몰랐다. 옆에 앉은 주연을 힐끔보니 얘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뻘쭘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으며 주변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재현도 같이 뻘쭘히 웃고 같이 눈치를 봤다. 눈동자를 굴리면서도 여유로운 척 고개를 끄덕거리는 주연의 모습이 웃겼다. 모두가 고요한 때에 췌, 하는 웃음을 뱉지 않으려 애써야했다. 모두가 기도를 할 때는 재현도 눈을 감고 하고 싶은 말을 마음 속으로 외워봤다.
뽑기 타임이 왔다. 교회에 들어올 때 나눠준 주머니 속 번호표를 꺼냈다. 재현은 왜인지 자신이 뽑힐 것만 같았다. 준비된 상품들의 크기는 제각각이었다. 제법 큰 것도 있었고, 굉장히 작은 것도 있었다. 이왕이면 큰 상품을 받고 싶었다. 뒤에 앉은 사람들이 수근대는 걸 들어보니 공기청정기도 있다하는 것 같은데, 이주연 집에 놔줄 생각을 하니 간절해졌다. 재현의 숫자는 98번이었다. 목사가 뽑기통에서 번호표를 뽑아 직접 번호를 불렀고, 상품은 산타옷을 입은 사람들이 가져다주었다.
상품은 작은 것부터 출발이었다.
2번! 목사가 큰 소리로 첫 당첨자를 발표했다. 예배석은 술렁이기만 할 뿐, 아무도 벌떡 일어나지 않았다. 산타 중에 한명이 당첨된 것이었다. 주연은 대박이다. 그러면서 웃었다.
준비된 상품들은 사람들의 환호성과 함께 점차 동이 나고 있었으나, 재현은 초조해하지 않았다. 아직 큼지막한 상품들은 남아있었으니까. 드디어 ‘공기청정기’처럼 보이는 상품의 차례가 왔고 재현의 번호 98번은 아직 불리지 않았다. 목사가 뽑기 통에 손을 넣더니 긴장감을 조성했다. 자, 마지막 상품입니다. 상당히 무거운데 잘 들고 가셔야겠어요. 마지막 번호는 …
98번!
재현이 터져나오는 환호를 죽어라 삼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두가 고요한 가운데 주연의 와아! 하는 짧은 환호성만이 들렸다. 축하드립니다. 선물은 우리 산타청년이, 자리까지 가져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형 진짜 대박이네요.”
“봤지. 형이야.”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대화를 하던 도중, 산타가 수레에 선물을 싣고 재현의 자리로 왔다. 제법 멀리서 보던 것보다 제법 컸다. 이거 어떻게 들고 가지, 고민하며 공기청정기가 맞긴 맞는지 포장지를 슬쩍 들추어보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사이 산타가 그렇게 말했고,
“어…, 진우씨?”
2)에 해당하던 확률은 급격히 전락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땀에 젖어 털모자 아래 머리칼이 다 헝클어져있던 남자는 주연의 말에 답이라도 하듯 사르르 웃었다. 그와 동시의 주연의 놀라 벌어진 입의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간다. 뭐예요? 그렇게 말하는 주연에 산타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작은 선물을 꺼내어 내밀었다.
“이거 아까 제가 받은 건데요, 주연 씨 주라고 받은 건가 봐요.”
산타는 눈인사를 하더니 다시 수레를 끌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주연의 동그란 눈은 그의 뒷통수를 떠나지 못했다. 교회사람들의 마무리 덕담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주연의 시선은 그 산타에 고정된 채였다. 주연아 누구야? 어… 요양원에, 봉사 선배님인데요. 엄청 성실하시거든요, 저 어려워하는 것도 모두 도와주시고. 다른 지역 사시는데 봉사하는 동안만 여기 계시는 분인신데… 공부도 하신다고 하셨는데, 교회도 다니시나봐요. 크리스마스에도 안 쉬시고 산타를…, 진짜 뭔가
감동이다….
주연이 눈을 두어번 깜빡인다. 그럼에도 초점은 변하지 않는다. 명확했다. 확률은 끝도 없이 하락한다. 산타가 예배당을 나가자 주연은 제 손에 꽉 쥐고 있던 선물의 포장지를 벗겨낸다. 작은 선물의 정체는 핸드크림이었다. 다이소에서 천원 한장이면 구매가능한. 그럼에도 주연은 우와,하고 웃는다. 거칠한 손으로 핸드크림을 꼭 쥔다. 우연이 만들어낸 사건은 벌어진다.
사건이 벌어지고 난 후의 확률은 가능성을 잃는다.
1)크리스마스에 2,3)동전 두개를 던져 모두 앞면이 나올 확률
= 1 * 0 * 1
= 0
교회의 크리스마스 행사가 모두 끝나고, 재현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해야 했다. 아까 교회에 오는 도중, 갓길에 차가 왜 그렇게나 많이 세워져 있나 했더니 다들 자가용을 끌고 와서였나보다. 차가 필수였다, 이 밤에는. 게다가 재현은 커다랗고 무거운 공기청정기를 끌고 걸어가야 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한숨에 육체의 고단함만이 섞여있는 것은 아닐 테다. 주연은 아직도 감동의 전율을 느끼는 듯, 앞서가며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재현이 ‘주연아.’하고 부르니 그제서야 뒤를 돌아 재현을 발견하곤 ‘형, 그거 어떻게 들고 가죠?’ 뒷북을 쳤다.
그러게나 말이다….
재현은 결국 최악의 상황까지 맞이하고 만다. 둘이서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을, 공기청정기를 이고 오르다 전조등에 사로 잡히고 말았다. 그 전조등의 차량은 주연과 재현 옆에 덜커덩 정차했다. 그 안엔 산타옷을 입은 그 청년이 있었고 ‘주연아, 태워다줄까?’ 그렇게 말을 건넸다.
그래서 지금 재현은 뒷자리에 공기청정기와 나란히 앉아 산타청년과 주연의 뒷모습을 바라봐야했다. 고요한 시골길을 오르는 차는 정말 고요했다. 차 안에서는 모과향이 났는데, 재현이 좋아하지 않는 향이었다. 승차감도 좋지 않았다. 오프로드 뺨치는 시골의 비포장도로를 그대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덜컹 덜컹. 크게도 흔들려 재현의 시야도 흔들리고 주연의 상체도 흔들렸다. 더럽게도 높은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는 차 천장에 머리를 박아야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주연도 머리를 박은 것은 마찬가지인데, 하하, 하고 웃었다. 정적을 깨는 소리였다. 그에 산타청년은 ‘너무 조용했나?’라며 지직거리는 구식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 속 사람들은 지직거리며 밸런스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우리 DJ현이 한번 해봅시다. 짜장이 좋아요, 짬뽕이 좋아요?
저는 느끼한 건 딱 질색이기 때문에, 짬뽕!
그럼 김치찌개 대 된장찌개!
아, 다 너무 좋아하지만 된장찌개요. 구수한 맛이 일품이잖아요.
그럼 마지막으로, 문자가 좋아요 전화가 좋아요?
저는 문자가 좋습니다. 용건만 간단하게 딱딱. 빠르고 좋잖아요. 또 빠르지 않더라도 서로 시간대가 달라도 연락이 어떻게든 이어지니까…
라디오를 듣고 있었는지 산타청년이 말을 꺼냈다.
“저도 짬뽕이 좋은 거 같아요. 근데 찌개는 김치찌개가 좋더라. 주연 씨도 그렇지 않나요? 급식 김치찌개일 때 되게 잘 먹던데.”
“어… 사실 저도 다 좋은데..”
“주연이는 된장찌개 좋아해요.”
“맞는 거 같아요.”
아…그렇구나. 산타청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간 또 정적은 이어졌다. 라디오에선 아직도 전화 대 문자의 논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럼 진우씨는 문자가 좋아요 전화가 좋아요?”
“저도 문자가 좋은 거 같아요. 피차 편한 게 좋죠, 아무래도.”
“그렇구나.”
“주연씨는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사람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주연이 또 웃었다. 재현은 괴로워졌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몸도 거지 같은 승차감도 이제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주연의 고개가 돌아감이, 까만 눈동자가 산타에 박혀있음에 가슴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속은 울렁거렸다. 애꿎은 공기청정기에 기대었다. 팔을 올리고 그에 얼굴을 묻었다. 싸구려 포장지의 느끼한 향은 재현을 더 괴롭혔다. 차라리 앞번호에 불렸다면. 그 작은 핸드크림, 나한테 왔더라면. 나 또한 망설임 없이 주연에게 내밀었을 텐데. 그럼 이 거지같은 차 얻어타지 않아도 됐을 텐데. 어쩌다 행운이 불운이 되었는지 참 모를 일이었다.
“형은?”
“어?”
정신 차리고 앞을 보니 주연이 몸을 틀어 재현을 보고 있었다.
“형은 문자가 좋아 전화가 좋아?”
“난 전화.”
주연은 재현을 빤히 보더니, ‘그런 것 같아.’라 말했다. 울렁울렁. 눈 앞의 주연도 흔들리고 재현이 기댄 박스 안의 공기청정기도 덜컹덜컹 흔들려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전화 좀 자주해. 주연아.”
“어?”
“나도 자주 할게.”
말을 마치고 재현은 고개를 완전히 제 팔에 묻었다. 멀미가 아주 심했다. 확률 같은 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