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층 회사 건물 20층 구내식당. 다른 회사는 지하에 넓게 구내식당을 만들어놨는데, 이 회산 신기하게 건물 꼭대기에 다다른 곳에 식당을 마련했다. 그 덕에 스카이라운지에서 식사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현재는 높은 곳을 그다지 선호하지도 않고…. 마음에 커다란 돌덩이가 들어있어 영 입안이 까끌까끌했다.
목에 걸린 사원증에는 ‘영업전략부 2팀 이현재 대리’ 라는 정보가 매달려있다. 입사한 지 5년 차. 직장 일은 눈 감고도 한다. 하지만 더 어려운 게 있었다. 아으으으…. 철야한 직장인 그 자체의 피로한 낯으로 연근조림을 씹었다. 설익은 연근조림엔 짭조름한 간장 맛이 났다. 눈물과 비슷한 맛이었다.
[오늘은 일찍 집 올 거지? ㅋㅋ]
특이사항1: 발신인-일방적 이현재
특이사항2: 보낸 사람만 있고 카톡방엔 1이 사라지지 않음.
이현재 대리는 육아를 하고 있다. 육아. 기를 ‘육’에 아이 ‘아’. 대답 없는 차가운 카톡방. 왜 답장 재깍재깍 안 하냐고 화내봤자 돌아오는 건 가장을 불신하는 멸시 어린시선뿐. 근래 들어 ‘일생에 사춘기가 없는 사람은 없다’라는 대명제를 강렬히 통감하는 바다. 마침내 이현재는 포털 지식인에 하소연한다.
<잘 자라던 애가 방황을 합니다.. 혼자서 이상한 짓을 하고 다녀요. 달래도 안 되고 혼내도 막무가내고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짜 미치겠네요 ㅎ>
연근 조림을 모조리 박살내고 있을 때쯤 달린 답변. 이런 미친…. 중얼댔다.
대한민국에 말 잘 듣는 아들이 있습니까? 이게 다 전 정권에서 정치를 이상하게 해서 애들이 농간을 당한 건데.. 쯧쯧.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싹~것들!!! 씨붏알. 그 아래에 또 달렸다. 심리상담센터를 운영한다고 소개한 친절한 말투의 전문가였다. 아래 네임택 보시고 상담 잡아주세요. 자녀분의 특성을 잘 이야기해주시면, 힘든 시기 지혜롭게 넘길 수 있는 최고의 솔루션 드릴 게요^^.
식은 참치김치찌개를 먹으며 고뇌했다. 아들에 대해 남에게 육성으로 내뱉어본 적은 없는데…. 건강 생각해서 흰쌀밥 대신 선택한 현미밥을 숟가락으로 긁어먹었다. 빈 식판을 보던 그가 마침내 퇴식구로 저벅저벅저벅저벅저벅저벅무한저벅. 어버이의 힘겨움이 느껴지는 몸으로 걸어갔다.
텅텅텅―. 미색의 대리석 퇴식구 위엔 하늘색 납작한 벨트가 차곡차곡 돌아간다. 그 위에 식기를 두면 식판을 자동으로 싣고 나른다. 퇴식구도 이렇게 일을 알아서 잘하는데. 내 식구는 왜 이러지.
그리하야
이현재는 맹추위가 한반도를 무섭게 공격하던 때. 담배 피우러 나온 사람도 하나 없는 혹한의 날씨에 옥상에서 양 뺨에 소름이 일어난 채로 전화를 걸었다.
《사춘기 아이들의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이루다 상담클럽’》
저기…. 네, 예약은 하셨나요? 예약은 안 했는데요, 지식인에서 여기 전화하라 그래가지고요. 지식인이요? 아, 저희 선생님이 답글 다셨나보다. 보자, 보자…. 혹시 불광동에 사시고 사춘기 자녀분을 둔 아버님? 아, 예. 뭐…. 엄밀하게 따지면은 맞습니다…. 그런데 일찍 결혼을 하셨나 봐요. 목소리가 영(Young)하세요! 으하하하,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희가 상담 전에 살짝 체크를 해야 하는데, 자녀분이 요즘 어떤가요? 요새 말을 잘 안 들어요, 집 들어와선 눈도 안 마주치고…. 근데 자꾸 새벽에 몰래 들어와서 제 얼굴을 쓰다듬고 그래요. 아버지랑 유대 관계가 엄청나네요? 부인한텐 어떠세요.
음…. 아내는 없습니다. 제가 (마음으로) 잉태해서 길르고 있어요. 어쩜 진짜 낳았을지도? 그런 마음이에요. (하하하.)
♪ 뚜우우―.
청명한 하늘을 바라본다.
호적상에는 아들이 하나 있다. 이름은 주연(子).
그는 현재의 유일한 첫 번째 아들이다.
불완전 오디세이
신정역 1번 출구에서부터 약 800미터. 신정네거리 쪽으로 오면 오피스텔이 밀집해있다.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곤 서울 끝자락에 살아 통학이 고단할 것 같아 직방을 눈깔 빠지도록 보며 구한 곳이다. 부동산 아저씨 구워삶아 좋은 가격에 나온 복층 오피스텔은 평수로 따지면 협소했는데 아래위 공간을 함께 쓸 수 있으니 제법 쓸 만했다. 여기 완전 좋다…. 이현재가 싱크대 물도 틀어보고 욕실 세면대, 변기, 수압까지 꼼꼼하게 체크했다. 보증금이 얼마라고요? 여긴 이천에 육십이요. 관리비는 십만 원 정돈데, 때에 따라 쫌 더 붙고 그래요.
“총각 혼자 살기엔 딱 맞지. 근데 여학생들이 더 많이 구해. 대로변이라 안전해서…. 경비원도 새벽부터 나와 있고, 엘리베이터도 카드키 안 찍으면 못 올라 오거던.”
“아아. 네, 좋네요. 입주는 언제부터 돼요? 개강 날짜 맞춰서 들어오고 싶은데.”
“개강? 학생이여? 직장인 아녔어?”
“아, 저는 아니구요. 제…. (호적상 자식)”
“동생 집도 구해주고, 요새 이런 형이 어디 있대.”
사람 좋은 웃음에 애매하게 웃었다. 가계약까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주연에게로 향한 메시지는 묵묵부답이다. 냉장고에 미미네 반찬에서 사 온 찬거리를 넣으면서 구시렁거렸다. 아주 상전을 모시고 산다, 씨펄. 신랄하게 욕하면서 집안 일 해치우고, 용암 같은 물에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현관문이 열린다.
현관에 불이 켜지고 5초 뒤엔 거실 측면으로 동그란 뒤통수가 보인다. 무광가죽 과잠 입고 모자 눌러쓴 인영이 그림자처럼 인사도 없이 방으로 사라져 마침내 그를 따라나섰다.
성질 같아선 문을 쾅 열어버리고 싶지만…. 주연은 은근 섬세한 영혼이다. 도자기처럼 잘 다뤄줘야 깨질 일이 없다. 똑똑똑똑. 하지만 급한 성격은 좀체 숨길 수 없어 템포 빠른 노크 소리가 사방에 울린다. 마침내, 문고리 잡으면서 친절하게. 들어 간다아…?
베이지 톤의 벽지와 가구가 들어찬 방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건 후드를 벗고 있는 뒷모습. 말랐지만 빳빳한 어깨서부터 허리까지는 무슨 협곡처럼 곡선이 이어졌다. 회색 후드를 침대에 던진 상반신 노출의 주연이 무심하게 돌아봤다.
“들어오라고 안 했는데요.”
“응, 알어. 근데 할 말 있어서 방문.”
“뭐가 이렇게 멋대로야….” 힐난하는 게 까칠했다.
“오늘 보고 온 집인데…. 복층이고 가격도 괜찮아. 학교도 가깝고.”
주연이 정물처럼 서 있었다. 침대에 앉아서 올려보다가 지릴 뻔. 억울하게 죽은 귀신도 저렇게 낯빛이 싸늘하진 않을 거다. 현재는 목덜미를 긁적거리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주연아아…. 잘 봐봐. 입주는 개강할 때 바로 할 수 있대.
이때 주연의 반응은?
흰 티셔츠로 갈아입은 그가 컴퓨터 앞 100만 원짜리 의자(이현재가 사줬다.)에 앉아 빙그르르 몸을 돌린다. 형. 이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큰 어조가 없었다. 암유어파더인데…. 현재는 인내를 씹어 삼키고 있다. 귀여웠던 주연이가 요샌 저승사자만큼 호러틱했다.
“나랑 그렇게 같이 살기 싫어요?”
“야, 내가 너랑 같이 살기 싫었으면 이 의자는 왜 사주고. 니 좋다는 게임기는 왜 사주고. 대학 등록금은 왜 내줬겠냐?”
“잠깐 봉사하는 정신으로다가? 오갈 데 없는 애 불쌍해서 정도가 아닐까 싶어요….”
“밥 잘 먹고 와서 또 열받게 하네?”
“죄송하지만 공복 상태에요.”
“그럼 밥 먹어!”
“살찔 거 같은데.”
남몰래 심호흡했다. 연예인이냐? 까불지 말고 븝 을른 믁으…. (밥 얼른 먹어) 대꾸도 없이 돌아가는 의자. 비싸서 그런지 회전이 부드러웠다. 어딘지 살짝 구부정한 곡선의 뒷모습과 깨끗한 뒷덜미가 보였다. 어느새 완연한 성인의 것이었다. 주연이 살짝 고개를 돌린다. 날카로운 옆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위로 살짝 말린 입매 끝에서 튀어나온 말은…. 형, 죄송하지만 나가주세요. 였다. 순순히 나가는 척하곤 몰래 문고리 열고 이주연이 골몰하는 것들을 훔쳐봤다. 관음이 취미는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적 자아는 언제나 관찰이 필요한 법. 블루라이트 안경을 쓴 이주연이 흐으으음…. 하고 앓았다.
※이탈리아 최초로 조력 자살 승인!
헤드라인이 강렬하게 빛났다.
☞☎ 순식간에 천국으로 데려가 주는 화봉법사의 신묘한 기운을 느껴보십시오!
사운드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저…. 서울에서 가려면 뭘 타고 가면 되나요? 정말 그, 거깋…. 거기 가면 잠자듯이 죽여주시나요? 비용은 얼마인데요? 헤에엑…. 오천만원 이상? 스위스 안락사도 삼천만 원인데, 한국인데 왜 더 비싸지. 혹시 디스카운트는 안 되나요. 아, 친구 소개…. 저는 친구가 없는데?
혹시…. 호적상 아빠도 되나요?
패륜아를 키우는 심정?
실시간으로 가슴이 쪼갈라지고 있는 겁니다…. 양감 좋은 가슴을 붙들고 현재는 절규했다.
◇
이주연이 이상행동을 보인 것은 약 2년 전부터다.
지금이 스물다섯이니까 스물셋부터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 한때 주연은 스님이 되겠다고 강원도 양양에 있는 절에 들어가겠다고 성화였다. 뼈 빠지게 돈 벌어서 대학 보내놨더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불같이 화를 냈다. 전혀…. 하나도 안 먹혔다. 주연은 원래부터 성질내는 현재를 별로 어려워하지 않는 성미가 있었다.
그렇다고 다니던 직장 그만두고 쟤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면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다 괜히 역효과 날까 매일 산해진미 바쳐가며 어르고 달랬다. 그러면 뭘 하나. 집 오자마자 썰렁하게 비워진 옷장만이 현재를 반겼다. 그길로 부리나케 양양의 X운사로 달려갔더니 이미 출가한 사내가 돼 동자승과 함께 물 양동이 들고 있었다. 현재는 그때 주연을 다시 속세로 복귀시키느라 한 달 넘게 팔자에도 없는 템플스테이를 해야 했다.
‘一子出家 九族生天’
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한 자식이 출가하면 아홉의 가족이 천상에 태어난다는 뜻이지요. 출가는 이토록 고귀한 것입니다. 호방한 인상의 스님이 차분히 타일렀다. 속세를 떠나는 가족을 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요…. 주연은 마냥 평온했다.
산사의 기상은 새벽 3시. 여름에는 새벽녘이 어슴푸레하게 올 테지만 겨울에는 한밤중이다. 이주연은 그 시간에 일어나 목탁을 치고, 공양하고…. 한 달을 그랬다. 무려 삼십 일을. 마침내 삼십 일 하고 이틀째 되는 날, 장기 휴가로 마침내 일을 잘려버린 이현재가 부처께 절을 하는 주연의 어깨를 질질 끌고 나왔다. 법당 밖으로 나오는 몸뚱이가 채식 덕분인지 전보다 가벼웠다. 불경한 행동에 입을 쩍 벌린 스님들의 노여움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전에 열 받아서 죽어버릴 것 같았다.
“진짜 스님 될 거야? 부처님 사랑만 받고 살 거냐고.”
“…….”
“말하는 거 잊었냐.”
“아…. 될까 했는데 안 되겠어요.” 침묵의 시간이 길어서인지 그 짧은 문장에도 목소리가 홀랑 까뒤집어졌다.
“뭐?”
“여기서 깨달음을 얻고 불로장생하는 사람이 있다길래 와봤는데, 주지 스님이 뻥이래요.”
사람은 살아서는 영원히 살 수 없다시네요. 윤회사상 알죠?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서 계속 떠도는 거예요. 그래서 이론적으론 이 몸으로는 불사신이 못 된다구….
이거 지금 한국말 맞나? 현재는 멍한 눈으로 앞의 남자를 훑었다. 근데 형. 이렇게 따라다녀도 돼요? 돈은 누가 벌어요, 형이 날 먹여 살려야 하는데…. 나무라는 표정이 엄했다. 현재가 포효하든 말든 하늘에선 눈이 내린다. 주연이 뭔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형, 우리 크리스마스 얼마나 남았죠? 야…. 절에서 예수님 생일 챙기면 어떻게 하냐. 와, 내일이네?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소원 들어주는데. 그냥 지금 땡겨 빌자. 눈 내리는 사찰 속 눈을 감은 주연. 법당 안에 보이는 부처님과 눈이 마주쳤다. 얘를 만나게 하신 건…. 어떤 형벌인가요? 제가 전생에 어떤 죄를 지었는지 몰겠는데 거 대충 좀 용서해줍시다!
참회가 절절하지 않았던 탓일까. 혹은 되바라졌던 탓? 주연의 기행은 계속되는 중. 불사신을 꿈꾸던 주연은 이제 ‘아름답게 숨지는 법’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종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죽음’을 읽는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진짜 이해는 하는 걸까? 무시무시한 키워드가 주연의 곁에 떠다닌다. 한번은 옥상 난간에 서서 바닥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막 흘렀다. 식겁하고 그를 끌어안은 바 있다. 그때 주연의 심장 소리는 쿵쾅쿵쾅쿵쾅쿵쿵쿵쾅쾅쾅우르르쾅쾅. 사실 현재의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무한한 삶에 집착한 지 1년차, 깜깜한 죽음에 집중한 지 1년차…. 내년에는 평범한 삶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를 거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다. 내년까진 이제 열 손가락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얼마 남지 않았다. 행복회로 돌리는 현재.
아니, 거기 말고오…. 아으. 쫌 더 넣어봐. 깊게 박아보라니까.
파괴하는 주연. 구내식당에서 본 유튜버의 말이 떠올랐다. ‘외국에선 친구와 함께 살면 그들의 섹쓰라이프도 같이 공유하게 되는 것’이라고. 여긴 한국인데 왜 이럴까…. 터가 별론가? 현재는 귀에 맞춤 제작된 귀마개를 껴봤다. 노이즈 캔슬링이 돼 숙면에 도움이 된다고 했는데. 오히려 멍한 귓가는 적막 속에서 소음을 찾으려 민감해졌다. 덜컹. 침대의 울림이 느껴지는 것 같애.
바로 옆방을 주연의 방으로 둔 걸 후회한다. 역시 전문가의 말처럼 자식의 방은 뚝 떨어지게 만들어서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줘야 했나. 침대 뽀사지는 듯한 진동이 울렸다. 결국 귀마개를 빼고 정좌하고 앉았다. 곧 복도가 소란스러워졌다. 이현재의 귀는 즉시 소머즈처럼 변했다.
황홀경 몰라? 웁쓰, 주연. 그게 뭔데? 한국 들어온 지 엄청 오래됐는데 왜 어제 들어온 외국인처럼 말해? 수수(Susu)야, 복상사라고 들어봤지. 오우…. 떡 치다가 하늘나라 가는 거? 그건 왜 이렇게 잘 알아? 강렬한 단어라 외웠지!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도 죽음에 이르려면…. 걍 여기서 해볼까? 와오, 뜨릴?!
“놀고 있네. 야, 외국인. 너 집에 가.”
“주연~. 형이 있었어? 완전 잘쌩겼다!”
“고고. 유어 홈 고고.”
찌푸린 채로 손 내젓자 키가 2미터는 돼 보이는 Susu가 현관 밖으로 나섰다. 평범하겐 안 나갔다. 빨간색 조던에 발을 끼워 넣으면서 현재에게 윙크. 생긴 건 향수 모델로 나올 법한 특출 난 외모긴 했다. 우리 주연이가 서양남 취향이라니…. 복도에 선 주연은 뺨을 긁적였다.
“주연.”
“네?”
“일케 행동해도 되냐?”
액자 하나 걸리지 않은 휑한 복도에 서서 눈깔에 힘주고 아렸다. 주연은 금방 씻고 나온 사람처럼 축축하고 청순했다. 줄무늬 나시를 입은 쇄골 곳곳에는 짐승한테 물린 것처럼 난장판이었다. 쟨 밥 안 먹고 다니냐? 왜 널 씹고 뜯고 즐겨? 따지듯이 묻자 어깨를 으쓱했다. 살 없는 뼈가 취향인가부죠. 뭐가 이렇게 당당해.
“이번엔 복상사로 죽을라 그랬어?”
“가능한가 싶어서….”
“닌 목숨이 여러 정도 되니. 그리고 키워준 사람 앞에서 그런 소리하는 게 얼마나 싸가지 없는 건지 몰라?”
언성이 높아졌다. 엄밀히 말해선 형이 키워준 건 아니죠….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을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진짜 너무한 거 아냐,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데. 마음속에선 섭섭한 마음이 봇물 터지듯.
현재는 양껏 야리다가 결국 손을 뻗는다. 순순히 안겨 오는 훌쩍 커진, 감당할 수 없는 이주연. 현재의 목소리가 작은 강아지를 보듬을 때처럼 작아졌다. 평소와는 다른 톤이었다. 작전 변경이다. 이럴 때마다 주연은 언제나 필히 ‘움찔’한다. 너한테 화내기 싫어. 그건 어떤 다짐 같았다. 잘해주고 싶단 말이야…. 어느새 끌어안고 있는 게 어색할 정도로 커진 주연이 웅얼댔다. 그럼 오늘은 같이 자요. 정말? 형이 불쌍하니까, 같이 자주는 거예요.
“자는 척하지 말고 주무세요.”
“자면서 너랑 대화 중.”
“개재미없다.”
“싸가지가 왜 이렇게 없지?”
“거짓말 하지 말라면서요. 그래서 솔직한 마음 말한 건데….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 거야.”
“는 반말이고.”
“꼰대 대박이에요, 형.”
“야, 주연아.”
몸을 뒤채자 한 번도 눈 감지 않은 사람처럼 주연이 마주 보고 있다. 깊은 밤. 집안에는 Susu도 없고 둘 뿐이다. 답해야 할 사람이 침묵하니 길어지는 공백. 나한테 형이라고 하는 게 좋아? 사실 형은 아니잖아. 새 질문에 답은커녕 등을 돌려 눕는다. 뻗은 어깨가 멀게 느껴졌다. 등을 타고 희미한 목소리가 들린다.
내년엔 현재야. 라고 부를 거예요. 그 다음 해엔 저한테 형이라고 부르게 시킬 거고요. 그렇게 안 하면 사람들 많은 데서 형한테 뭐라고 거예요. 막 버릇없다고 그럴 거예요. 너…. 취향이 레알 독특하구나?
곧 주연이 규칙적으로 호흡한다. 쌕쌕쌕, 세발자전거 타이어의 바람이 미세하게 빠지는 소리 같다. 얘의 호흡을 듣고 있으면 수마가 몰려온다. 현재가 판판한 등허리를 끌어안았다. 라벤더 향…. 니 냄새. 졸린다, 주연아아….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긴 속눈썹이 감긴다.
숙면 후 상쾌한 발걸음으로 살금살금병 걸린 심처럼 출근 준비. 충분한 수면 시간을 채운 현재의 얼굴에는 윤광이 돌았다. 반면 킹사이즈 침대에 웅크려 자는 주연은 찐빵 같다. 잘 때 유난히 아기처럼 변하는 인상이 신기해서 현재는 뺨을 주물 거렸다. 귀여운 것들은 마음을 허무는 재주가 있다. 으으으…. 현재의 옆에 잘 땐 늦잠이 유독 잦은 주연은 여전히 비몽사몽이었다. 다녀올게, 이따 봐. 졸음이 잔뜩 묻은 얼굴이 커다란 손을 흔들었다. 이따 봐…. 갈라진 음가의 잔상이 길다.
◇
출근한 지 약 7시간 32분 초과하던 시점.
연말의 격무에 저녁밥을 구내식당에서 먹을지 법카로 짜장면 시켜 먹을지 고민하던 때.
핸드폰에 진동이 온다.
지
이
이이
이이이
이이이이
이이이이이잉.
축적된 날카로운 예감이 차곡차곡 쌓여 신경을 건드린다. 뇌수가 쭉쭉 빨리는 착각.
발신자 이주연
특이사항3: 주연은 절대로 먼저 전화하는 법이 없음.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웅성거리는 소음이 예고 없이 쏟아진다. 현재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한겨울에 외투도 하나 걸치지 않고. 정신없이 택시를 잡았다. 택시기사가 하얗게 질린 표정을 보곤 액셀을 밟았다. 차체가 동력을 급히 얻어 온몸도 덜덜 떨렸다.
혹시 이주연 씨 보호자 되십니까? 동생분이 화재 때문에 좀 다치셨어요. 지금 응급 이송 중인데, 빨리 병원으로 좀 와주세요.
어쩐지 잠이 잘 온다고 했다. 어쩐지 고분고분하다고 했다. 해성병원 응급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앰뷸런스가 입구에 세워져 있다. 보이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이주연. 이주연인데요…. 하고 두서없이 소리쳤다. 간호사가 이주연 님 보호자세요? 왼쪽 벽에서부터 두 번째 침상에 가보시면―. 이라고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병원 이름이 정신없게 쓰인 커튼을 열었다. 눈을 감고 누운 주연이 보였다. 죽은 건가? 그토록 원하던 대로? 본능적으로 바이탈 장비를 확인했다. 심장이 규칙적인 박동으로 뛰고 있었다. 그대로 힘이 풀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오히려 현재의 심장이 저승까지 밑바닥 친 느낌. 찬 바닥이 수렁 같다.
“어이구, 아기 형이 많이 놀랬나보네. 우리 영감도 고혈압 터지기 전에 와서 벌써 한바탕했어.”
옆 침대에 앉은 할머니가 뺨에 긴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다. 앞집에 사는 노부부 내외였다. 할아버지는 열이 오른 채로 손부채질에 한창이었다. 할망구 죽어버린 줄 알고 우체국 갔다가 쓰러질 뻔했잖아! 귓가가 쟁쟁했다. 할머니가 현재의 손을 두 손으로 꼭 붙잡았다.
놀랬지, 미안해요. 우리 손녀가 스마트폰에 뭘 보냈는데, 있지. 안 열리는 거야. 그거 열어주구 손녀 사진이랑 동영상도 보고 그러다가. 총각 집에 커튼에 불이 확! 나도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아. 들어보니까 그거 뭐야, 영감 뭐랬지. 캐-앤-들. 불길이 자꾸 거세지니까 어째. 나가재니까 저 총각이 챙겨야 될 게 많다고, 많다고…. 그러다가 우리 둘 다 까스. 머라했지? 유-독-가-쓰. 그래, 그래가지고 실려 오게 된 거야. 집에 벽지랑 베란다 샷시가 쪼매 녹았대. 근데 이 아기는 뭘 이렇게 오래 잔대. 의사 와서 보더니 야는 심-각하게 잠이 부족하대애.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남?
눈을 감은 이주연. 응급실 침대 아래엔 불길에 그을린 백팩이 보인다. 현재가 사준 프라다 백팩이다. 퀴퀴한 연기 속에서도 챙겨온 것들. 사고가 날 것 같으면 빨리 도망 나오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가방의 지퍼를 열자 쏟아져 나온 수많은 파일철. 내용은 뻔하다. 그놈의 죽음죽음죽음죽음! 어디서 산건 지도 알 수 없는 수십 개의 향초와 아로마 오일. 현재는 그것들을 바닥에 패대기치듯 내버렸다. 그제야 주연이 부스스 눈을 뜬다.
차갑고 불편한 침대…. 충혈된 현재의 눈. 셔츠는 풀어 헤쳤다. 머리는 헝클어졌고 얼굴은 한 사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앞의 상황이 차례로 떠오르며 현실감각을 찾은 주연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느릿한 움직임으로 커다란 손바닥에 제 얼굴을 묻었다. 이주연. 어느 때보다 차가운 부름이 내려앉는다. 한참 뒤 시선을 맞추면 일렁거리는 게 보였다. 현재를 봐온 역사상 가장 끓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딴 걸 왜 챙겨와. 정신 안 차리고 살아?”
“…형.”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정말 죽고 싶어? 내 앞에서? 날 선 말이 사이를 부유한다. 현재의 목 끝이 화마를 삼킨 것처럼 뜨거웠다. 무엇을 알아챘는지 주연이 현재의 손목 부근을 큰손으로 잡았다. 살짝 걸쳐질 정도로. 보잘것없는 악력에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대신 주연이 그랬다. 잘못했어요. 담에는…. 불 안 나게 조심할게요. 닌 내가 지금…. 불냈다고 뭐라 하는 걸로 보이냐? 따뜻한 손바닥에 힘이 실린다. 짧게 끌어당긴다. 결국 가까워진 거리. 현재의 뱃가죽쯤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차라리 불냈다고 뭐라고 해요.
형이,
잠도 못 자고
죽지도 않는데.
어떻게 내가 먼저 죽겠어요….
인간의 기대수명 120세 시대. 기타 끔찍한 질병에 걸리지 않았을 때를 가정한다.
반면 불로불사의 이현재, 늙지 않고 죽지 않는다. 햇수로 160년째다.
이현재는 주연을 먹이고, 입혔다. 과장이 아니고 정말로 그랬다. 한 사설 민간 재단에서 운영하는 베이비박스 앞에서 주연을 데려온 게 약 25년 전이니까 강산이 두 번 변하도록 길러냈다. 사실 현재가 사는 동안 강산은 수십 번 변했다. 표현을 달리한다. 현재가 살아지는 동안, 그러니까 저절로 살게 된 무수한 기간.
불멸하고 있다. 노화 불능의 상태로 스물여섯의 모습을 한 채로. 빨간 구두를 신고 영원히 춤추는 아가씨처럼 현재도 영혼도 쇠하지 않는 육체에 갇혀 있다. 다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마도 불의의 사고가 난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영원한 동면에 들 수 있을지도.
영원히 삭지 않는 얼굴로 사는 게 낭만적이라고 여긴다면 오산이다. 노화하지 않는 인간은 괴물이라 가족들도 그를 두려워했다. 약 160년 전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나사)의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하기도 훨씬 전이다. 아니…. 그보다 더 이전. 당시는 철종 11년쯤이었고, 에도 막부의 권위가 스러져가던 때였다. 이것도 감이 안 온다면 이때는 나이팅게일이 영국의 수도 런던에 간호학교를 세우던 때고, 찰스 디킨스가 ‘위대한 유산’을 집필하던 시대였다.
아무튼 현재는 격변의 세상에서 이름을 바꾸고 모습을 숨기면서 온갖 나라를 전전했다. 낯선 타국에서 정체를 숨기기 쉬울 줄 알았지만 오히려 아시아인이 생소한 국가에선 더 튀었다. 1990년대 말엔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의 한국은 지구 종말론에 열광하는 사람들과 새천년을 맞는다는 묘한 열기에 들떠있었다. 1998년 1월. 2000년이 시작되기 두 해 전.
이현재는 불광동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불광동. 1910년대 초기만 해도 경기도였지만 1950년쯤 서대문구에 편입된 동네. 북한산 근방에 있어 자연경관이 수더분했고, 너무 빠르게 변화하지 않아 좋아하는 곳. 특히 연립주택을 지나면 나오는 공원 어귀는 현재의 안식처였다. 롱패딩이 성행하지 않아 쌩으로 한파를 견디던 그날. 울고 있는 한 여성을 마주친다.
여자의 긴 눈매가 마치 범죄자라도 본 것처럼…. 커졌다가 시뻘겋게 변했다가. 현재에게 묵직하고 뜨거운 것이 품에 들어왔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옅게 떨리고 있었다.
선생님을 알아요. 불광동 구석 골목에는 영원히 늙지 않는 선생님이 있다고…. 할머니가 말해줬어요, 어려울 때 한 번 도와주신다고, 딱 한번 그러신다고 하셨다면서요…. 엄청난 부자라고. 그래서 배곯을 일은 없다고.
뺨을 모조리 얼려버릴 정도의 무서운 한파였다. 여자가 현재의 손을 잡았다. 뭐라고 입을 떼기도 전에 여성이 흐느꼈다. 제가 꼭 다시 데리러 올 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할게요. 오늘도 선생님이 오지 않으면 이곳에 맡기려고 했어요. 가는 손가락을 따라가자 그 위로는 ‘키울 수 없는 아이를 유기하지 말고 이곳에 놓아주세요.’ 라는 문구가 쓰였다. 아이를 봤다. 어미를 잃고도 울지 않았다. 현재는 인정이 많은 사람이다. 아기에게 찬바람이 새지 않도록 당겨 안았다. 입이 얼어 혀도 얼얼했다. 현재가 고개를 들었다. 거리가 휑했다. 남겨진 것은 불로불사의 남자와 젖먹이 하나였다.
이름은 주연이라고 지었다. 눈발에 짓이겨진 전단에 ‘주님의 인연’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기 때문. 워낙 울거나 보채지 않는 애였다. 하지만 갓 난 젖먹이를 키우는 건 경험 많은 현재도 어려운 일이었다. 육아 경험이 전무한 그는 오래 알고 지난 수녀를 찾기에 이른다.
바다가 보이는 지역 교구에 있는 수도원의 수녀는 주연을 보육원에 넣어줬다. 스스로 먹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는 전문적인 손길이 필요하다고 그랬다. 주연은 어려서 두 번이나 머리 뉠 곳이 옮겨졌다. 현재는 짬이 날 때마다 주연을 보러 갔다. 무럭무럭컸다. 정상적인 속도로. 녹음이 푸른 목조 수도원 어귀를 걷던 수녀는 어느 날 그랬다.
“주연이가 사람을 잘 따라요. 모난 구석도 없고…. 형 노릇을 잘해요.”
“진짜요? 왜 이렇게 기특하지.”
“형제님, 이제 수도원엔 오지 마세요.”
멀리서 지켜보세요. 그 애가 평범하길 바란다면 말이지요. 무섭고도, 맞는 말이었다. 수녀는 현재의 대답을 추궁하듯 살짝 웃었다. 그때가 주연이 13살 때의 일이었다. 또래 아이들보다 반 뼘은 더 자랐던 애. 현재는 이후로 그곳에 발길을 끊었다. 대신 주연의 나이 20살이 넘었을 때부터 혜화동 신학교에 전화해 ‘혹시 이주연이라는 학사가 있나요?’ 따위를 물어보곤 했다. 신부가 되어버렸으면 가서 미사나 들어보려고. 그렇게 몰래 얼굴이나 봐보려고. 현재도 이런 마음의 기저가 모호했다. 부성애인가? 하지만 운명은 주연 신부의 합법적 광팬이 될 기회를 주어지지 않았고.
눈앞에 나타난 건 스물셋의 주연. 불광동 은혜 아파트 복도식 현관 앞이었다. 바람 빠진 자전거가 구겨져 방치된 문 앞에 후드를 쓰고 서 있었다. 거의 180에 육박해 보이는 커다란 키. 결 좋은 직모가 눈가를 살짝 가리고 있었다. 유선 이어폰을 귀에서 빼낸다. 긴 눈매와 검은 동공이 어딘지 익숙했다. 주연이 아기처럼 옹알댔다. 몸집이 커져도 현재에게 주연은 올웨이즈 아기 같았다.
와….
“정말 하나도 안 늙었네.”
“는 반말이고.”
“수녀님이 형한테 지금처럼 돈이나 타 먹으래요. 가까이하면 힘들어진다고. 뭔 성직자가 그래….”
“형?”
“그럼 그 얼굴 보고 아빠 소리해요?”
“신분 위조하면서 너까지 호적에 넣는 게 쉬운 줄 알아? 돈도 들이는데 그런 대접도 못받냐.”
은근히 가부장적이네요. 찰캉 찰캉. 현재가 열쇠 구멍에 열쇠를 밀어 넣었다. 수녀님 말대로 그냥 나한테 돈만 받고 살지, 뭐 하러 왔냐? 훈기가 느껴지는 집에 먼저 들어섰다. 고개를 돌리면 역광의 주연과 눈 부신도록 맑은 하늘이 시야에 가득 찼다.
형이 저를 제일 오래 봤으니까? 잃어버린 엄마도 찾아줄 수 있을 것 같구. 현재가 가볍게 턱짓했다. 주연의 스니커즈가 세월을 좀 먹은 현관에 닿는다. 그림자가 걷힌 이목구비가 선명했다. 가족들은요, 아무래도 다 돌아가셨나요? 혹시 이런 거 묻는 건 실례인가요. 근데 비슷한 사람끼린 물어도 괜찮지 않아요?
현재가 주연의 왼쪽 신발 끈을 무릎을 굽히고 앉아 묶어줬다. 주연은 그 머리통을 보면서 생각한다.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그러던데. 현재가 고개를 든다. 무구한 눈빛이 닿는다. 주연은 눈을 접어 웃었다. 아다인가요? (뭐?) 얘들이 맘에 드는 사람 있으면 이렇게 물어보라던데요? (그 새키들 전화번호 뭐야. 야 글고 니가 날 왜 맘에 들어 해?) 이렇게 안 늙는 건 반칙 아닌가? 형 얼굴 보고 맘에 안 들 사람 없을걸요. 저는 쫌 청순한 스타일 좋아해요.
현재가 천천히 일어나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바라봤다. 주연이 상박을 유심하게 살핀다. 글래머도 좋아해요. 현재는 굽슬굽슬한 머리칼을 헤집었다. 아오, 두통와.
멀리서 지켜보세요. 그 애가 평범하길 바란다면 말이지요.
어떻게 해. 거리 두기해? 말아. 고뇌하던 현재는 상아색 복도로 손을 뻗는다. 일단 야야야야야야야야. 너. 저기 멀리 떨어져 있어봐. 생각 쫌 하게. 이주연이 끝이 탁 막힌 소리를 내며 웃었다. 형 스물여섯이라매요. 그건 액면가고…. 그냥 양심 없이 살면 안 돼요? 영화 보니까 다 그러던데. 막 1억 살 차이 나도 서로 사랑하고. 너랑 내가 사랑을 왜 하냐고.
평생 형 생각을 많이 했어요. 수녀님한테 막 캐물었어요. 안 늙는 남자가 있대요. 백 년 넘게 살아서 모아둔 돈도 많대요. 그런데 나를 주워서 먹이고 입히고 그랬대요. 근데 한번을 얼굴을 안 비춘대요. 그니까 신경 끄고 살래요. 어떻게 신경을 꺼요? 와서 보니까 이렇게 생겼는데. 저는 형 아들 죽어도 안 할 거예요. 근친**금지는 제 마지막 양심이에욯.
근본도 없고 맥락도 없는 얼빠네.
◆
비(非) 아들 선언하며 청순 글래머 취향을 설파한 주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순진하게도 불멸을 꿈꿨다.
영화처럼 드라마처럼 미스터리한 주인공 옆에서 살기 위해선 함께 특별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현재는 이따금 가족을 그리워했다. 사진도 한 장 없는 그 얼굴들을. 드라마에서 가족 이야기만 나오면 울적한 표정을 했다. 그럴 때마다 주연은 함께 하고 싶었다. 무수한 영생을.
그래서 비범한 주지 스님이 영원한 삶의 비법을 전수받기 위해 그곳을 찾아갔다. (눈치 없는 이현재도 따라왔다.) 1개월간의 정성스러운 기도에도 인간의 노화는 멈출 수 없었다. 다음으론 사이비 광신도들과 함께 ‘영원한 나라’에 가는 교리도 6개월간 수강했다. 금가루가 샘솟는 하늘나라는 무슨…. 강남 한복판에서 사람들 붙잡고 MBTI 검사해주겠다고 꾀어내 신도들 끌어들이는 데만 실컷 이용됐다. 전국 방방곡곡의 사짜들도 만났다. 날린 건 돈과 시간. 얻은 건 좌절뿐. 최종의 최종으론 서울대 명의를 찾았다. 인간의 노화를 멈추는 방법이 없냐고, 끈질기게 질문했다. 질린 표정의 늙은 의사는 ‘그랬으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겠냐’고 했다.
결론. 이주연의 노화를 멈추는 것은 불가능!
늙으면 눈물이 많아진다는데…. 현재는 실질적 영감탱인데도 눈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만난 유기견을 봉사센터에 연결해주고, 그곳에서 아파서 생을 다하거나 혹은 나이가 지긋해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개들을 보곤 오열했다. 온기가 남아있는 등에 코를 박고. 형아도 꼭 따라갈게. 너무 늦지 않게 갈게…. 그렇게 말했다. 주연은 그때 현재가 죽음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둔한 조상님은 모르겠지만 주연의 온 신경은 현재에게 쏠려있어 그의 마음을 알아채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다음으로 결심한 것은 현재의 안락한 죽음이다. 이런 거에 자기 때문에 골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혹시라도 따로 살자 할까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근데 오피스텔 구해왔을 땐 진짜 쫓겨나는 줄 알았다.) 비용이 비쌌고, 아프지 않게 죽었다는 후기를 봐도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리뷰가 믿겨지질 않았다. 블루라이트 안경을 콧잔등에 걸친 채 새벽 밤을 지새다 보면 갑자기 울적해진다. 시큰한 마음이 뱃속에서부터 뇌까지 올라붙는 기분. 그럴 땐 현재의 방을 찾는다.
베란다와 가까운 커다란 침대엔 웅크린 현재가 있다. 침대 옆 탁자엔 약봉지와 귀에 쑤셔 넣은 귀마개 케이스가 있다. 거액의 돈을 주고 맞춰도 현재의 귓가는 언제나 붉게 달아올라 있다. 아프지 않게 귀마개를 빼줬다. 옆자리에 누웠다.
불멸하는 이현재의 치명적인 결함. 고질적인 ‘불면’이었다. 생명이 연장될수록 잠이 줄었다. 24시간 중 22시간을 깨어있었다. 가라앉은 밤에도 현재는 언제나 밤을 지샜다. 불면이 심해져 현실과 꿈의 경계에 있을 땐 가끔 혼잣말을 했다. 죽지 않아서 무서워…. 그럴 때마다 이 방에 홀로 남을 사람이 불쌍해져 견딜 수가 없다.
눈을 감은 현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주연은 눈가에 커다란 손을 얹어두곤 아기를 어르는 부모처럼 느릿하게 숨을 쉬며 넓은 가슴을 큰손으로 토닥였다. 현재도 이렇게 주연을 토닥인 적 있을까? 곧 현재가 깊은 숨소리를 낸다. 왜 죽지 않아서 왜 모든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할까. 주연은 현재를 오래도록 생각했다. 늙지 않는 남자, 죽지 않는 남자. 모든 것을 필연적으로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남자.
그럼 만약 내가 죽으면 현재 형의 방엔 누가 캔들을 켜주지. 누가 말랑한 귀 뒤에 아로마 오일을 발라주지. 누가 아기처럼 자는 이 얼굴을 독식하지. 남은 현재 형은 누가 안아주지.
◇
병원복을 입고 뱃가죽을 축축하게 젖게 하는 남자. 불쌍하게 우는 주연의 눈가를 닦아줬다. 팅팅 불은 얼굴은 날카롭고도 동시에 마음을 무너뜨린다. 마침내 현재는 받아들이고 만다. 이주연이라는 개체에 대해. 약 160년의 긴 생 가운데 만난 특별한 존재에 대해. 외면하던 것들을 불시에 인식한다.
1년 전 불광동 밤. 골목.
은혜아파트 복도에서 고개를 내려 중년의 여자와 마주 서 있는 주연을 본다. 안기는 주연. 여자의 등을 커다란 손으로 쓸어주는 주연. 이윽고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는 주연. 멀리서 말을 거는 것 같다. 어떻게 할까, 엄마 따라서 가도 돼? 현재는 침을 꿀꺽 삼킨다. 건조함에 목구멍이 째지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침내.
고개를 저었다.
가지 마. 난 너밖에 없어.
사실 양심 없는 건 이현재가 더 했다.
남은 주연이 큰 손으로 부르튼 눈가를 훔친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개를 훽 창가로 돌린다. 엏! 하고 바보 같은 소리를 낸다. 병원복 입은 사내를 달래주다 말고 현재도 동시에 창을 본다. 형 눈 온다. 아까 전까지 울고불고 하던 게, 지금은 애처럼 눈동자를 빛내며 코딱지만 한 창문에 얼굴을 디밀었다.
“우리 크리스마스 얼마나 남았지?”
“내일인데. 날짜 감각이 왤케 없냐.”
“그때도 눈 올까?”
“네이버엔 안 온다는데.”
“화이트 크리쓰마쓰에 소원 빌어야 되는데. 지금 걍 땡겨 빌까?”
“뭔 소원을 맨날 대출처럼 쓰냐….”
주연의 소원이 하루 일찍 하늘로 솟구친다. 현재의 소원은 25년 전부턴 동일하다. 이주연이 원하는 대로 해주세요. (합장 이모티콘.)
현재도 창가로 고개를 뺐다. 밤하늘에선 결정이 크지 않은 싸락눈이 내렸다. 눈을 감은 주연의 속눈썹이 길었고, 파르르 파르르 떨렸다. 좁은 틈으로 밀려드는 눈발이 속눈썹에 엉겨 붙자 눈가를 손으로 덮어줬다. 주연의 광대가 동그랗게 올라온다. 뭔 소원 빌어? 극락왕생. 들어주겠냐? 제 정신 박힌 산타면 청순글래머 좋아하는 남자 소원 같은 거 안 들어줘. 그럼 평온한 동면. 현재가 때맞춰 버럭했다.
야, 오늘 죽을 뻔했잖아. 또 그런 소원 빌고 싶어?
무섭게 나무라자 주연의 눈썹이 쳐진다. 반성하고 있어요. 몇 번 말해요…. 근데 현재 형. 왜? 우리 (사랑) 하는 사인가요…. 니가 반항 안 하고 내 말 잘 듣고, 게이 남자친구 안 만들면 한번 생각해볼게. 전제 진짜 존나 많네…. 와, 말투. 내가 널 그렇게 가르치디? 짜증나니까 그러죠. 야, 태도 뭐야? 접때도 내가 혼내고 있는데 딴 생각 했지. 얼굴이 집중 불가처럼 생겼잖아. 이젠 걍 말도 대놓고 까네. 내년이면 나랑 형이랑 표면적 나이 똑같거든요. 현재가 황당한 표정으로 주연을 본다. 암튼 생각해보세요. 형은 160년 살았어도 나 같은 아들은 처음이잖아. 내가 누구 땜에 엄마도 안 따라갔는데. 내가 형 위해서 무슨 생각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리고 이렇게 생겨서 이렇게 구는 호모를 찾기 쉬운 줄 알아? 하나도 닮지 않은 주연이, 하늘에 대고 소원을 재차 속삭였다. 기도문을 외는 것처럼 경건했다.
야, 현재야. 이현재야.
내가 영원히 재워줄게.
외롭지 않게 해줄게. ◈